우리나라가 잘 되는 길

중도와 실용의 길 (2부 우리나라 역사적 상황)

공석환 2009. 10. 1. 06:14

이 글은 '중도와 실용의길(1부 외국사례)' http://blog.daum.net/shkong78/236   에 계속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 보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제1공화국까지의 상황에 대해 기술한다. 이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글이 이 블로그에 여러개 있다. 하나는 '우리 민족의 뿌리' http://blog.daum.net/shkong78/266 , , '과학기술과 역사'  http://blog.daum.net/shkong78/89라는 글이다.

 

우리민족은  퉁구스계 및 몽고 등의 북방계통의 피를 받아 진취적인 정신을 가지고 살아 왔다. 고구려가 수차례 수당의 대군의 침입을 막아내고, 통일신라가 불완전한 한반도 통일을 이루기는 했지만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 20만을 격파하였다.

 

발해가 신라의 불완전한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연합으로 고구려 고토와 연해주 지역을 계속 지배하였다. 최근에 발해의 고분에서 나온 기와 등 유물의 모양이나 묘석에서 황후라는 표현이 발견된 점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것에 보강하는 증거가 되고 있다.

 

그런데 발해의 멸망 원인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960년경 일어난 백두산의 대 폭발이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유력하다. 백두산의 폭발은 천지라는 큰 화산호를 만들고 일본 혹카이도까지 화산재가 날라가 지층에 발견될 정도의 큰 분화였다. 그러한 백두산의 분화로 그 인근한 발해는 수년간 냉해 등 기후의 변화로 흉작을 걲었을 것이다. 그러한 내부적인 혼란상태에서 거란의 침입을 받고 멸망하였다는 것이 시기적으로 보아도 일치한다.

 

최근 중국 왕조의 변화기에 가뭄이나 냉해 등 큰 기후의 변화가 있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로 기아를 겪게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러한 기후의 변화를 왕의 부덕이라고 여기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민족의 시작지로 성스러운 산으로 알려진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영역이 한반도 안으로 축소하게 된 것에 큰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고려시대에도 광종은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고 황제를 칭하였다. 고려는  몽고의 침입 이후에 대부분의 중국지역이 원에게 직할령으로 완전히 복속된 가운데도  자주국가를 지켜냈다. 오히려 민족의 고토인 만주지역의 회복을 하려는 준비를 하였다.

 

신채호선생은 묘청의 서경(평양)천도론이 좌절된 것이 우리 민족 천년대 가장 큰 사건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감행한 것이 우리 민족이 요동등 만주의 땅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아까운 사건이라고 본다.

 

묘청의 주장은 풍수지리설에 의거한 것으로 사실 그 상황에서 고려가 만주를 회복할 기회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왕이 요동정벌군을 보낼 때는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명이 아직은 중원(중국본토)에서 아직 활동하여 우리민족이 요동땅을 회복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당시 최정예군인 요동정벌군에 최영장군이 직접 나서서 지휘를 하였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왕이 혹시 자신의 신변을 우려하여 자신의 장인인 최영장군이 개경(개성)에 남아 있기를 원하였고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개경에 남아 있는 군대로서는  막아낼 수가 없었다.

 

나는 이성계가 '우리 민족 최대의 역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성계의 반역은 '성공한 쿠데타'로서 합리화되었다. 조선초기만 하더라도 새로운 정권을 세운 후 혁신을 이루려는 시도가 있었다. 세종은 한글 창제뿐 아니라 장영실 등 과학기술 개발도 장려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세조는 단종을 폐한 후 자신의 명분을 살리기 위해 만주 북벌을 계획하였다가 문신들의 만류로 포기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문제는 문신들이 유교를 중심으로 소위 소중화(小中華, 작은 중국이라는 뜻)를 표방하면서 진취적인 노력이 부족한 사회였다. 더 큰 문제점은 과거의 문을 좁힘으로써 인재 등용의 선택을 줄이고 기회박탈을 한 폐쇠적인 사회였다는 것이다. 조선에서의 양반이란 이성계 건국 창업공신들과 세조의 다른 쿠데타에서의 공신들의 집안이 뿌리가 된 것이다. 과거에서 양반으로 한정하고, 더구나 이북5도의 경우는 이성계가 북방 함경도 부근의 여진 출신이라서 잘 알듯이 용기가 많아 위험하다고 하여 등용을 기피한 것이다.

 

참고로 경제의 정의에서 분배의 균등 보다 기회의 균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미국적 사고방식이다. 최근에 로스엔젤레스에서 미혼모에 태어나서 거의 노숙자처럼 살아 온 흑인 소녀가 능력을 인정받아 하바드에 장학금을 받아 진학한 사건이 보도되었다. 최소한 사회가 발전하자면 능력이 되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국가의 국력, 경제력, 군사력, 과학기술력은 같이 가는 경향이 있다. '과학기술과 역사'  http://blog.daum.net/shkong78/89라는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런데 문신 중시의 조선사회는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문신 중심의 사회에서 혁신이 부족한 결과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게 고전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외부적인 사정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한 요인도 있었지만 일본이 가진 조총도 큰 요인 중 하나였다. 고려 때 왜구가 침입하면 최무선이 앞선 화통(포)의 기술로 무찌르고 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 시절에는 그러한 총포의 기술력이 역전된 것이다.

 

조선후기에 전세계에 큰 변화가 일어 났다. 우선 병자호란때 종래 오랑케라고 생각한 여진족의 국가인 청태종에게 인조가 무릅을 꿇고 사죄하는 삼전도의 굴욕이 일어난 것이다. 그 여세를 몰아 청은 중국 본토를 17세기에 통일한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청이 중국은 다 합병하여 지배하였지만 조선은 비록 굴욕은 주었으나 독립국가인 그대로 나둔 것이다. 이것은 여진족과 우리 민족과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 보아야 한다.

 

여진족은 과거에 숙신, 물길, 말갈 등으로 불리우는 만주 북방에 사는 민족이다. 언어적으로 우리 민족과 같지는 아니하다. 그러나 언어구조나 어휘도 유사한 것이 많고 외양으로는 거의 비슷하다.  이 블로그의 삼국시대의 언어(옮긴글) http://blog.daum.net/shkong78/255 참조.

 

여진족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발해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성계의 출신 성분에 대해 이씨 왕조의 창건자라서 미회되는 것이 많아 정확한 사실 고증이 어렵다. 전주 이씨로서 북방으로 이주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확실하지 아니하다.  당시 원나라 쌍성총관부에 속해 있는 함흥에서 태어난 것이 확실하고 최소한 여진족의 영향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이후에 청나라가  중국을 무참히 군사력으로 합병하면서도 조선을 완전히 합병하지 아니하고 독립국가로 나둔 것은 최소한 사촌정도의 국가라는 가까운 인척인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진족이 중원을 지배하는 동안 조선은 얼마만큼 내부적인 혁신을 하였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영조, 정조의 혁신도 근본적인 국가체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청나라에 전하여진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실학파들은 지금 관점에서 보아도 혁신적인 사고를 가졌으나 정권에서 그러한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

 

그 사이에 서양은 큰 변화를 겪는다. '과학기술과 역사'라는 글에서 자세한 언급을 한 바 있지만 기원 이후부터 17세기까지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세계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세계보다 과학기술이나 경제력에서 앞서갔다고 보는 견해가 최근 유력하다 .

 

그러나 18세기에 서양에서는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이 높아짐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큰 변혁을 겪는다. 즉 프랑스에서는 왕조를 뒤 엎는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영국은 청교도 혁명과 같은 과격한 혁명도 있었지만 의회가 힘을 가지는 형태로 시민들이 힘을 가지는 형태로 사회가 변하여 간다.

 

이러한 일반 시민이 동등한 기회를 가지고 사회 경제활동을 해가면서 유럽은 과학기술의 획기적인 진보, 그리고 산업, 군사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일어난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영국에 무참히 패배한 것은 세계의 힘이 유럽 등을 위시한 서양세계로 기울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 상황에서 일본은 명치유신을 통한 자체혁신을 통하여 힘을 기른다. 명치유신에서 중시할 중요한 두가지 요소가 교육과 대외개방이다. 서양에 문물을 개방하고 국민의 교육에 힘씀으로서 아시아의 최강국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런데 작년 시점으로 일본이 중국에 경제력으로 추월당했다. 그러한 충격으로 자민당 정권이 민주당 정권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이 블로그에 쓴 바 있다. '민주당이 집권한 이유' http://blog.daum.net/shkong78/252   참조.

 

우리나라는 이러한 국제상황의 변화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내부적인 동학, 임오군란 등의 반란은 일본과 청의 힘을 얻어 진압하고 지배층 내부적인 개혁 시도인 갑오경장도 이미 늦고 미봉책이었다. 대원군의 혁신도 일부 양반층의 특권을 줄이려는 시도를 하였느나 경복궁 중건에 너무 국력을 많이 사용하여 일반 민중들을 힘들게 한다.

 

지금 세종시, 4대강사업에 대한 논란을 보면서 대원군 시절 경복궁 중건이 생각이 난다.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집안 잔치인 두 사업 다 일단 중단하고 신중하게 검토하면서 대외적인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데 힘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결국 우리가 국권을 일본에 침탈당한 것은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한 때 우리나라도 스위스처럼 중립국 선언을 하는 방안도 조선말에 연구가 되었다. 그러나 중립국도 자체의 힘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즉 자체 방위력을 가졌으나 주변의 어느 나라편도 들지 아니하겠다는 선언이 실효성이 있는 것이다. 히틀러가 2차세계대전을 일으켰을 때 중립국이라고 주장한 폴란드도 침략은 하였으나 스위스는 침공을 못한 것을 돌아 보아야 한다.

 

독립운동가들의 글을 보면 자체적인 비판이 많이 보인다. 안창호선생도 일제에 대항하여 군사 봉기를 일으키기 전에 우리의 힘을 키우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신채호선생도 아직 조선왕조를 전면적으로 비판하지 못하였으나 조선사회의 모순점에 대해 비판적인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유명한 표현을 사용하셨다. 즉 우리나라 내부의 가진자와 안 가진 자와의 투쟁 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국가의 힘이 부족한 상황에서 국가간의 경쟁에서 밀려 국권을 잃었다는 표현을 한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좌우 및 진보, 보수의 대립은 조선말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인사들과 장개석, 미국에 기대는 것을 기대한 보수적인 인사들과의 대립이 심하였다.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것도 독립운동 시절에 좌우 대립이 심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권을 찾더라도 과거 이씨조선 왕조로 회귀하는 것을 생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임시정부에 외무장관으로 국무위원을 지낸 조소앙은 1930년대 초에 삼균(三均)주의를 제창하였다. 그의 삼균주의는 정치의 균등화, 경제의 균등화, 교육의 균등화를 말한다. 보통선거제로 정권을, 국유제로 경제를, 국비 의무교육으로 교육을 가지런하게 하자는 것이다. 즉 어느 정도 사회주의 사상의식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미국과 소련이 연합군으로써 일본에 승리함으로써 우리나라는 타율적으로 해방되게 되었다.  그 이후 진행된 상황은 한마디로 혼란 그 자체이다. 김구, 송진우 같은 유력 정치인의 암살 그리고 같은 민족간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런데 그 좌우 및 미국 소련, 중국의 국제적인 대립의 대리전인 한국전에서 우리 민족은 큰 피해을 입었다. 그리고 해방후 우리나라 지식인들 중에서는 사회주의 시각을 가지고 남로당에 참여하거나 한국전쟁 중 납북한 사람들도 많았다. 과거 이씨조선 시절에 지주 등의 지배층의 경제적 독점에 대한 비판 의식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북에서 생활을 하다 넘어 온 사람들은 공산주의 실상을 보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개인적으로는 필자의 부친도 그에 해당한다. 부친은 1928년 생이신데 해방후 이북에서 중학교 교편선생을 하시다가(18살에 중학교 교사가 되셨다), 한국전쟁 중 1, 4 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 오셔서 나중에 군장교 근무도 하셨다

 

그리고 일제에 협력한 인사들의 청산에 대한 문제에 대한 사회의 분열이 심하였다.  최능진같은 경우는 경찰고위직에서 일제에 협력한 사람들을 청산할 것을 요구하다가 한국전쟁중 군사재판에서 공산분자로 몰려 내란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다.  그런데 최능진이 경찰직에서 일제 청산을 주장할 때 경찰청의 고위 책임자로  일부 친일출신의 경찰도 계속 근무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조병옥, 장택상인 것이 의외이다.

 

조병옥의 경우 외국에서 독립운동도 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를 할 때 야당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지금 조순형의원의 선친이다. 장택상도 외국에서 독립운동도 하고 이승만 대통령 밑에서 3대 국무총리도 지냈으나 나중에 야당 지도자를 한 사람이다. 특히 장택상의 비서관으로 우리나라 유명한 야당지도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이 있었다.

 

 조병옥씨와 장택상씨의 미국, 영국에서 공부하고 이승만과 함께 구미외교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군사적인 것보다도 외교적으로 우리나라 독립을 시도한 사람들이다. 처음에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미국과 협력하면서도 안정된 국가를 만들려고 하는 시도에서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도 계속 경찰에 임용한 것이다. 조병옥이 최능진에게 "단순히 밥을 먹기 위해 일제에 협력한 사람 중 능력있는 사람을 계속 써야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위 두사람은 이승만에 대항하여 야당지도자를 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입장에 따라 극에 극이다.. 지금 일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자유주의 체재를 지킨 우리나라 국부로 추앙하려는 의견도 있고, 친일세력을 자기 이익을 위해 남겨두고 독재를 한 사람으로 극히 평가절하하는 쪽도 있다.

 

이승만은 1875년생으로 조선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먼 왕족뻘이지만 왕위 계승권에서는 이름만 왕족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서양문물에 눈을 뜨고 1896년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개화 구국운동에 참여한다. 그는 1904년 고종의 밀사자격으로 도미하여 일제의 침략을 미국에서 폭로하는 활동을 하다가 밀사활동은 실패하였어도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는 죠지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바드 대학에서 석사,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가 고학을 하면서 장학금과 아르바이트에 의존하여 어렵게 미국 사회에서 공부를 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 와서도 대통령이라는 명칭보다 '이승만 박사'라는 명칭으로 통한 것이다.

 

그는 미국 주류정치를 겪고 나서 외교적인 수단으로 독립을 강구하였고 국제기구의 위임통치를 주잗하다가 상해 임시정부와 마찰을 일으켜 대통령에서 면직당한다. 이승만은 해방 후 미군정의 요청에 의해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인다.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하였다. 미국서 생활하면서 공산중의자에 대한 뚜렷한 불신을 가지고 있어고 통일정부로 시간을 끌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38선 이남 지역에서의 선거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주도한 것이다. 제헌국회에서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후 국회의 간접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이승만은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과의 외교력을 발휘하여 미군의 개입을 이끌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 정부가 배제된 가운에 이루어진 휴전협상에서 불만을 표출하며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과감한 카드도 던진 바 있다. 이승만이 미국 주류 사회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미국을 끌고 당기며 외교적인 힘을 발휘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인정해야 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집권하에서 토지개혁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 하다. 즉 유상개혁이기는 하지만 평년작의 1.5배를 지가로 하여 5년에 나누어 갚는 형태이니 연 소작의 30%를 내서 토지를 획득하는 것이다. 북한이 무상으로 토지개혁을 하였지만 북한의 세금이 높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남한의 토지개혁이 북한보다 더 경제효과가 있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지주들이 땅을 판 돈으로 일본사람들이 남기고 간 적산산업시설을 인수하여 산업자본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학교 의무교육을 실행하는 등 교육을 강조하였다. 우골탑이라는 말대로 땅과 소를 팔아 대학을 가는 풍토가 조선시대의 학문 중시와 아울러 이때부터 생긴 것이다.

 

다만 민족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친일경찰 출신인 김창룡등의 친일파를 다수 고위직에 썼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러나  이 부분은 위 조병옥의 말 대로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일제 때 협력한 사람을 다 안 쓰기는 어렵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은 그 당시 친일파를 단순 생계형, 적극 협조형태로 하여 분리작업을 하여  청산 작업을 하였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이 가장 비판받아야 할 점은 두가지라고 생각한다. 우선 오랜 미국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무리한 개헌을 하면서 장기집권을 하여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는데 장애가 되었다는 점이 첫째이다. 결국은 3.15 부정선거와 4.19의거로 불명예 퇴진하게 된다.

 

두번째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북한은 1950년대 말에 천리마 운동 등 대대적인 경제 재건을 시작한다. 그러나 경제각료들이  우리나라도 그러한 국가가 나서서 경제개발 계획을 세우자는 제언에 대해 그러한 것은 사회주의 국가나 하는 것이고 자유주의 국가는 국민이 알아서 하게 나두어야 한다고 거절한 것이 이승만의 한계이다. 즉 이승만은 경제적으로 국민을 잘 살게 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된다는 혁신의 생각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중도. 실용, 결국 나라가 경제적으로 힘이 있어야 하는데 이승만은 미국에 기대어 자본주의 체재를 수호하기는 하였으나 자본주의 경제 체재를 이용하여 국가 부흥이라는 꽃을 피울 안목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박정희는 실용관점에서 국가경제를 키우는 위대한 안목이 있었다.

 

이 글에 이어 다음 글에서 민주당 정부 이후에 대한 고찰을 하여 보기로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중도, 실용, 혁신에 대한 평가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