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 블로그에 있는 중도와 실용의 길(1부 외국사례, 2부 우리나라 역사적 상황)에 연결하여 쓰는 글이다. http://blog.daum.net/shkong78/236, http://blog.daum.net/shkong78/298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것은 많아도 사실 그 평가를 냉정하게 하기는 쉽지 아니하다. 사실 나는 이승만 박사의 독재를 물리친 4.19의거보다 몇 달 전에 태어났다. 그러나 나의 성장기는 박대통령의 집권기였다. 초등학교 때 박대통령 전기를 읽은 기억이 난다. 1972년 소위 10월유신이 일어났을 때 당시 중학생이었지만 사회 전체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1979년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은 암살당하고 그의 시대가 지나가게 된다.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기 전에 1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민주당 정부가 의원내각제 형태로 존재한다. 역사를 돌아가 보면 민주당 정부나 박대통령의 집권은 둘 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2부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간단히 한 적이 있다. 이승만은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미국과의 외교관계로 자본주의 사회를 지킨 공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주류사회도 겪고 명문 대학인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민주주의와 먼 행동을 보였다.
나는 이승만 시대에 대해 부모님으로부터 간간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회의 부패는 만연하고 미래의 경제적인 희망이 없던 사회이였다. 최근 이승만을 국부로 미화하려는 견해에 찬성할 수 없다. 자본주의를 수호한 공적보다 민주주의의 토양을 내리지 못한 과오와 국가의 경제를 살리려는 비젼이 없었던 관계로 과오가 더 큰 사람이다.
이승만이 없었으면 우리가 북한의 공산사회에 통합되었을 것이라는 논리에 동의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미국은 처음부터 이승만이 독선을 싫어하였고 더 온건한 지도자들과 협조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큰 국제적인 정치 상황에서 비록 한국전쟁 직전 미국의 국무장관인 애치슨이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하는 큰 오류를 벌였지만 미국이 공산주의와 대립하는 냉전 상황에서 남한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국력을 키우고 국민을 잘 살게 하겠다는 비젼을 가지고 못하였다.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사업을 사회주의 국가나 하는 것이라고 배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독단적으로 자신이 종신 대통령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다. “첫 단추를 잘 채워야 모든 것이 잘된다”는 격언이 있다. 이승만은 첫 단추를 잘못 채웠을 뿐 아니라 잘못된 단추를 채운 우스꽝스러운 옷을 부정한 방법으로 계속 고집한 사람이다.
이승만의 독단으로 국회에서 합리적인 토론을 통한 정책적인 타협을 하는 민주주의 과정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이승만 정권이 4.19의거로 갑자기 무너지자. 민주당 내에서 신파 구파로 분열되어 서로 내각 자리에 대한 권력싸움을 벌리면서 사회를 수습하기 보다는 정치권이 더 혼란을 부르게 된 것이다. 결국 박정희에게 군사 쿠데타 기회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5.16 정변 직후 유엔군 사령관인 매그루더의 진압명령 요청을 민주당 구파인 윤보선 대통령은 받아 들이지 아니 하였다. 그 당시 혼란상황에서 다시 유엔군과 국군과의 내전이 열릴 경우 북한의 침공 가능성을 우려하였고 장면총리와의 극단적인 권력 대립 상황에서 일단 장면정부가 물러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박정희의 야심을 알고는 적극적인 야당 지도자가 된다.
최근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가 없이 민주당 정부가 계속 집권하였다고 가정할 경우에도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계획을 실행하였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사실 유신시대의 유명한 재야운동가로 의문사를 당한 장준하 선생이 장면 내각에서 국토건설단 단장을 맡아 국토 개발계획을 연구한 사실이 있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가 계속 집권을 하였다고 가정할 경우에 박정희 대통령처럼 국가의 경제개발계획을 과감하게 추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 이유는 후에 기술하겠지만 박정희 대통령처럼 정치적 반대를 무릎쓰고 외국 자본을 과감히 끌여 들이는 결단력을 내리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1917년 몰락한 양반가 5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모친이 박정희를 너무 늦게 가져 간장을 들여 마시는 방법으로 낙태를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낳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부친인 박성빈이 동학의 접주로 활동하였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졌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를 하면서 본인도 사회를 바꾸어야 겠다는 문제의식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대구사범에 진학하여 졸업 후 지금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3년정도 문경보통소학교에 근무하게 된다. 1940년 만주국 육군군사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194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편입하여 1944년4월 졸업한다. 1944년 12월 만주국 소위로 정식 임관한다. 그리고 창씨개명도 하게 된다.
박정희가 만주국 육사에 들어가게 된 동기에 대해 여러 정황을 보고 판단하여 보면 식민지시대에 학교 선생으로 안주하지 아니하고 무엇인가 하여 보겠다는 야심이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인 선생들에게 몰매를 맞고 힘을 길러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런데 만주국 소위로 임관한 후 광복군을 토벌하였다는 설도 있고 반대로 광복군의 밀정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객관적인 증거를 보면 당시 이미 광복군은 박정희가 만주국 소위로 근무한 지역에서 철수하였으므로 광복군과는 직접적으로 관계없이 중국 공산당의 군대인 팔로군과 교전에만 관련하였다는 것이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가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지 얼마 안되어 일본의 항복과 함께 무장해제를 당하고 국내에 입국한 것이다.. 입국 직전에 광복군으로 편입한 후 귀국하였다는 설도 있는데 그 것이 진실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2기로 입학 단기 과정을 마치고 한국 육군 소위로 한국군의 경력을 시작한다.
그러나 1948년 남로당 연루를 받고 재판을 받았다. 그 과정을 보면 친형으로 후에 남로당에 가담하였다가 처형당한 친형인 박상희의 영향을 받고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사에 협조하여 다른 당원의 명단을 확인하고 실형을 면하고 예편된다.
그러나 그를 아끼는 상관들의 도움으로 현역군인이 아닌 문관으로 근무하다가 6.25 전쟁 중 다시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한다. 6.25 전쟁중에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에 반대하여 이용문 등 일부가 일으키려고 한 쿠데타에 참여하였는지 여부는 지금 증거가 불확실하여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1953년 11월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소장 진급심사에서 당시 경무대 행정관으로 실세 역할을 한 곽영주가 반대하였는데도 김정렬 장군의 강력한 추천으로 진급하였다.
그런데 당시 한국군의 주축은 박정희 외에도 다수가 일본 육사 장교 출신이었다. 일부에서는 박정희나 다른 일본 육사 출신에 대해 무조건 친일파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냉정하게 보면 일제말에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일본 육사에 자원하여 나가는 것은 사실 목숨을 거는 것이다. 당시 일본 육사 출신중의 일부는 일본 주류에 가담하여 출세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관으로서 나중에 자기의 뜻을 펼쳐 보려는 뜻에서 지원한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고 본다.
박정희가 남로당 연루 등의 여러 사건에서 다른 선배나 상관들에게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받은 것은 그 당시 군인들이 사실 단순히 국가의 방위의 역할을 하는 군인이 아닌 정치참여의 생각을 박정희와 같이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민주당 정부 시절에 박정희가 다른 군인들을 수합하여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을 때에도 박정희의 후배 뿐 아니라 상관이었던 많은 군인들이 그에 동조한 것이다. 김정렬, 정일권 등 당시 군 수뇌부에 있던 다수의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5.16정변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후에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요직을 가지고 참여하게 된다.
. 5.16 군사정변 이후 사회의 혼란만을 막고 나면 민간정부로 이양하겠다는 약속은 허울이었고 군사정부는 약 2년간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형태로 실제 권력을 행사하였다. 박정희는 전역한 후 민주공화당을 세운 후 1963년 대통령 후보로 나가 윤보선을 물리치고 당선된다. 결국 다시 선거를 통하여 정당성을 얻는 방법으로 박정희는 정식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은 3선개헌, 유신을 통하여 연장되어 사실상 종신으로 집권하다가 1979년 김재규의 암살로 끝난다. 그 중간에 일본과 한일협정, 베트남 국군 파견 등 큰 정치적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 초기에 남로당 경력으로서 좌익이 아닌가 의심을 받고 미국으로부터 견제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견한 후 박정희는 미국과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맺어 장기 집권을 한다. 그러다 집권 말기에는 미국 카터 대통령과 첨예하게 대립한다. 미군철수에 대항하여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여 자주국방을 한다는 태도도 보였다.
집권과정이나 집권 후에도 냉정히 보아서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이 단추를 잘못 채운 업보로 당시 우리나라에 민주주의의 전통은 없었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의회에서의 토론이다.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이 실제 행정의 권한을 크게 가지더라도 국회가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여 진지하게 토론하여 그 토론 결과에 대한 국민의 여론을 살펴서 예산 배정 등 행정부 집행에 중요한 사항을 결정하여야 하는 것이다.
1961년 짧은 기간의 민주당 정부에서도 신파, 구파로 나뉘어 내각 자리를 놓고 막후에 정략적인 대립만을 하였을 뿐 진정한 의회 정치를 하지 못하였다.. 현재의 국회도 마찬가지이다. 여당이나 야당 모두 국회에서 진지한 토론을 거친 후 그에 대해 국민의 여론을 대의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위대한 이유는 경제개발을 위해 정치적으로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아니한 점이다.
우리가 장사를 하려고 하여도 우선 장사 밑천이 있어야 한다. 박대통령이 집권 후 처음 미국을 방문하여 경제개발을 시작할 원조 자금을 요청하였을 때 미국은 거절하였다. 그래서 분단국가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서독을 방문하여 광부와 간호사 등의 인력을 보내고 그 사람들의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얻게 된다. 그리고 서독의 에르하르트 수상의 자문을 받아 한일협정을 추진한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과 나중에 월남에 파병하면서 장병들의 봉급 등으로 받은 돈이 결국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밑천이 된 것이다..
경제개발의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에 광부, 간호사를 파견하고,, 당시 정치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협정을 체결한 것,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하여 대가를 받은 것은 당시 일본에 대한 적대감 등의 정치역학을 무시하고 한 결정은 평범한 사람이 하기 힘든 혁신적이고 실용적인 결단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그러한 결단력은 그의 경제적 동반자인 정주영 회장의 일화에도 같이 연결된다. 박정희 대통령이 조선산업을 추진할 때 모든 기업인이 안 맡으려고 하다가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의 강력한 명령에 가까운 권고를 받고 영국에 차관을 얻으러 가게 되었다. 정주영 회장이 바클리 은행에게 우리나라 화폐의 거북선을 보여주고 우리나라가 조선에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무리하게 차관을 받은 것도 박대통령이 뒤에서 지원하여 주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에 많은 신경을 썼다. 1966년 미국이 원조한 한국과학기술원을 설립하고 해외과학자들을 집과 높은 봉급을 주면서 유치하여 과학기술 연구를 장려한 것이다.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과학기술을 육성하는 데 차관을 사용한 것은 민족의 먼 장래를 본 것이다. 또한 과거 농촌이 농한기에는 놀면서 시간을 허송 세월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농촌을 개혁하기 위해 새마을운동을 시작한 것도 새로운 개혁시도라고 본다.
1968년2월 일본으로부터 받은 차관과 베트남 파병으로 받은 대가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시작하여 1970년 7월에 준공한 경부고속도로는 우리 나라 산업발전의 대동맥이 되었다. 이러한 것은 독일을 방문하고 나서 국가의 육상 교통이 원활하여야 국가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신념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야당지도자들은 김영삼. 김대중을 포함하여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하였다.
다만 지금 현정부가 4대강 운하나 정비사업을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비유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다. 지금 스피드 시대에 하역과정에 걸리는 비효율로 운하는 사양시설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운하의 효용이 더 없다.그런데 지금 MB정부에서 시행하려는 4대강 정비사업은 치수 목적과는 전혀 맞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 가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항상 신경을 쓴 것이 수출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칠 정도로 수출실적에 집착하여 매년 수출실적에 대한 시상식을 치루었다. 그러나 그 것은 올바른 안목이었다. 우리나라가 잘 살기 위해서는 내수로는 부족하고 서독처럼 수출 위주의 경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본 것이다. 정주영 회장이 영국 은행에서 돈을 빌려와 건설한 현대중공업도 내수가 아닌 수출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유한양행은 우리나라에서 큰 기업이었다. 반면에 현대자동차가 초기에 유한양행에서 기업연수를 받으면 배웠다는 것을 지금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국내 시장에 안주한 유한양행은 국내에서는 아직 유수한 제약회사이지만 국제경쟁력이 없다. 반면에 현대자동차는 미국에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수출에 주력하여 지금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즉 수출에 주력한 기업은 국제적인 기업이 될 수 있었지만 내수에 만족한 기업은 우물안 개구리 신세인 것이다.
나는 박정희가 만주사관학교에 가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나서 우리민족이 한반도에서 안주하여서는 국력을 키울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우리나라 영토는 한반도를 벗어나기 어렵지만 전세계를 상대로 상품 수출을 하면서 시장으로 만들면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은 부가가치세를 도입하여 세금 징수를 투명화하면서 안정적인 재정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 결과로 민주공화당이 야당이 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지금 평가해 보면 부가가치세의 도입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경제 투명화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도 우리나라를 위해 꼭 필요하였던 제도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태도도 논란이 많다. 사실 남로당 입당의 전력 때문에 북한에 대해 초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친 형인 박상희의 친구였던 황태성이 북한에서 밀사 자격으로 입국하였을 때 간첩죄로 사형을 내렸다. 그리고 개발 후 통일이라는 명제를 내 걸고 정권초기에 북한과의 관계는 제한적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만 하더라도 남한이 북한에 비해 경제력이 뒤 떨어졌었다. 1970년대 초에야 남한이 북한을 추월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시도 등의 사건의 여파로 당시 남북한이 화해를 하기는 쉽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1972년에 경제력에 자신이 생긴 이후에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북에 밀사로 보내 7. 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제정하여 남북이 화해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다만 공동 성명 후 3달만에 유신을 발표하였다는 점에서 유신의 준비를 위해 하였다는 비판도 있다. 정리하면 박대통령은 북한과의 관계는 미완성으로 남겼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암살된 후 박정희 대통령이 감성적으로 불안하여진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국민의 진정한 의사가 박대통령에게 전달이 되지 아니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술자리에서 믿었던 심복으로 중앙정보부 국장이던 김재규로부터 암살당하고 만다. 부마항쟁 이후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박정희를 암살하였다는 김재규의 법정 진술도 다시 역사를 냉정하게 보는 시점에서는 무시할 수 없다. 박대통령이 후계자를 길러 평화적 정권 승계를 하지 못하고 종신 집권을 고집한 업보로 생각한다.
정리하면 비록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정변으로 집권하여 장기 집권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무시하였지만 그의 추진력과 국가 민족의 부강에 대한 비젼이 없었으면 지금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에서 산업국가로 도약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그는 우리나라의 국력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라고 본 실용주의자인 것이다.
특히 경제 개발을 할 자금이 없던 시절에 독일에 광부, 간호사를 보내고, 월남전 참전, 그리고 당시 여론의 심한 반대를 받은 일본과의 수교를 통하여 사업 밑천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받은 원조로 다른 것보다 우선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을 설립한 것도 민족의 힘을 기르겠다는 장기적인 안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의 리콴유, 등소평과 함께 경제적인 큰 비젼을 가진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리콴유는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추진한 사람이지만 등소평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사례를 많이 참고하였던 것으로 들린다. 지금도 중국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싱가포르와는 달리 경제의 투명화나 공무원의 청렴 및 부동산 공영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부동산 공영화를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박대통령의 경제개발 계획 수립에 큰 역할을 한 남덕우 전 총리의 회고록에도 나온다. 특히 경제개발 과정에서 개발되는 요지의 부동산을 일부 정치인들이나 공무원 등 사전 정보를 아는 사람들이 선점하여 부당하게 이익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전두환 전대통령이 김종필 등의 과거 정치인에 대한 재산환수를 할 때 부동산 개발차익이 주로 문제가 된 것이다.
세종시와 사대강사업에도 그러한 것이 고려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어 걱정된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가 재정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가 다음 단계로 발전해야 될 이 중요한 시기에 3년간 국민의 세금 20-30조를 장기적인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해외 수출을 지원하기 위해 국제경쟁력 있는 산업분야의 기술개발을 지원하거나 해외 건설 진출을 도와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그 큰 돈을 사전에 충분한 조사도 없이 국내에서 4대강, 준설, 보 만들기, 토지보상 비용으로 쓰겠다는 것은 시대 착오적인 생각이다. 국민들은 과거 경험으로부터 면밀한 사전조사없이 무리하게 벌리는 건설사업 들이 향후 쓸모 없이 국민의 부담이 되는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잘 안다.
박정희 대통령도 부동산에 대한 문제의식은 가졌으나 싱가포르보다 큰 우리나라에서 자기 임기동안 그러한 조치를 다 마무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향후 국가발전을 위한 장기계획을 세울 때 모범이 될 나라가 스위스와 싱가포르라고 생각한다 ( 스위스에 대해서는 ‘스위스를 본받자’라는 글이 이 블로그에 있다 http://blog.daum.net/shkong78/10 ). 싱가포르와 관련하여 박정희와 리콴유를 비교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라고 본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 우리나라의 진행상황을 논하여 보기 전에 다음 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리콴유 수상을 비교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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