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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이 존귀한 인물임을 나타내는 ‘붉은색 망토’를 씌운 황금색 동상은 놀랍게도 신라인 장보고였다. 사진은 산둥성 룽청시 츠산 기슭에 자리 잡은 장보고 기념관 내 동상. [룽청시(중국)=오종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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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27일 들른 중국 산둥성 룽청시 츠산 기슭의 관광지 ‘위해석도적산풍경명승구’.
장보고가 1200년 전 세웠던 사찰 법화원이 복원돼 있었다. 그 옆 기념관에 있는 황금색의 장보고 동상에는 ‘붉은색 망토’가 입혀져 눈길을 끌었다. 중국에서 동상에 붉은색 망토를 입히는 것은 ‘성공한 인물’을 뜻한다는 게 이곳 관리자의 설명이다. 관리업체인 위해석도적산여행사 장융창 총경리는 “한 해 약 5만 명의 한국인이 이곳을 찾는다”며 “장보고 대사는 자신의 업적이 1200년 지난 지금 한·중 양국을 이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보고는 처음부터 고국인 신라보다 중국·일본에서 더 많이 알려진 재계 인물이다. 당나라의 저명한 시인 두목(杜牧)은 번천문집에서 장보고를 인의(仁義)를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기근과 사회불안으로 한반도에서 고달프게 살아야 했던 신라인들에게는 ‘당(唐 )드림’이 있었다. 마치 근·현대의 ‘아메리칸 드림’처럼. 장보고는 어촌에서 태어나 당 드림을 실현한 최초의 한국 기업인으로 남아 있다.
◆부를 얼마나 쌓았나=장보고의 재산 규모는 우선 ‘흥덕왕과 면담’ 자체에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목포대 강봉룡(역사학) 교수는 “이들의 만남은 해적 소탕을 위한 청해진 설치가 공식적 이유이지만 당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신라 왕실에 장보고가 상당한 지원을 약속해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왕실재정을 지원할 만큼의 재산을 가졌 다는 뜻이다.
교역 규모로 파악할 수도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박남수 자료정보실장은 “장보고는 일본과 다양한 품목을 거래했다”며 “일본과 1회 교역 규모를 쌀로 환산하면 1만3000섬 정도 ”라고 설명했다. 현재의 시중 쌀값(10㎏ 약 2만5000원)으로 따져보면 한 섬은 두 가마(160㎏) 정도이니 약 52억원 수준이다. 일본과 한 번 교역액이 52억원이므로 일본과 다른 중국 거래 등을 고려하면 장보고 선단의 교역액은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 실장은 『8~9세기 한중일 교역과 장보고의 경제적 기반』논문에서 장보고 선단의 전체 교역액을 ‘상상하기 어려운 대규모’로 추정했다. 그는 “속일본후기와 같은 기록에 따르면 장보고 선단의 물건이 인기가 높아 비싼 값에 사거나 예약금을 미리 내야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장보고는 신용을 바탕으로 물품 대금을 먼저 받고 나중에 상품을 건네는 방식의 거래도 했다. 그만큼 신용도가 높았다. 물물교역 시대에 이미 신용거래를 했다는 뜻이다.
중국에 세운 법화원의 규모로 추정할 수도 있다.
법화원은 당시 산둥반도에서 제일 큰 절이었다. 2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강당, 승려 30여 명을 수용하는 승방,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객방이 있었다. 땅도 많았다. 부산외국어대 권덕영(역사학) 교수는 “법화원에 머물렀던 일본의 고승 엔닌의 기록과 현지 토질 등을 고려할 때 법화원은 13만 평(약 43만㎡) 정도의 토지를 소유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런 법화원을 장보고가 설립했다는 것은 그의 재산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촌 출신에서 거상으로=삼국사기에는 ‘문성왕(839~856)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려 할 때 조정 신료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바닷가 출신)이란 점을 들어 반대했다’고 기록돼 있다. 골품제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야망을 펼치기 어려운 처지였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사회불안과 신분제의 한계를 느낀 장보고는 20세쯤 당으로 건너가 군인이 됐다. 장보고는 활을 잘 쏘는 등 무술에 능해 ‘궁파’ ‘궁복’으로 불렸다. 당시 당나라는 세계 제국으로서 개방된 국가였다. 장보고는 반당(反唐)세력 토벌 작전에 투입됐고 30세 즈음에 군중소장에 오른다. 현재의 연대장급으로 신라인으로서는 출세한 셈이다. 반당 세력 토벌이 마무리되는 821년을 전후해 그는 군대를 떠난다.
군을 떠난 장보고는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해운과 소금생산 등에 종사하며 재당 신라인을 조직화했다. 당뿐만 아니라 신라·일본과의 교역에도 나선다. 김문경 숭실대 명예교수는 “당나라군은 필요한 물품의 상당 부분을 자체 조달해야 했다”며 “장보고는 전투가 없을 때 군의 살림살이를 맡으며 장사에 눈을 떴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대사가 824년 일본을 방문했다’는 구법승 엔닌의 기록으로 보아 재당 시절 일본과도 교역한 것으로 보인다. 모국인 신라와 네트워크가 많아 다른 상인보다 유리했다. 군인 시절 반당 세력 토벌을 위한 지원군으로 온 신라군과 당나라군 사이에 연락장교를 하며 쌓은 인맥이 많았기 때문이다. 장보고는 한·중·일 3국을 잇는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특히 귀족들에게 인기 높은 희귀 상품 등을 팔며 부를 쌓았다.
특별취재팀 ▶ 팀장=김시래 산업경제데스크 ▶취재=김문경 숭실대(역사학) 명예교수, 천인봉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김창규·염태정·이승녕·문병주·강병철 기자 ▶사진=안성식·오종택·변선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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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앙일보가 장보고의 업적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연제 기사를 내고 있는 것이 시의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이제 섬같은 존재가 되 버렸다. 과거 고구려, 발해 시대에 만주의 넓은 땅을 가지고 있던 역사를 주장해 보아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국민교육상 과거의 자취와 현재의 상황을 알기 위한 것으로 만족해야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간도땅이나 만주 고토에 대한 영유를 주장해 보아야 중국과 외교 경제 여러분야에서 마찰만 생길 것이다.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다.
오히려 이제 우리를 섬나라로 생각하고 과거 영국이 전세계와 무역을 하면서 내부 혁신으로 산업혁명을 일으킨 것을 본으로 삼아야겠다.
나는 대우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말을 우리 현대 역사상 개인이 한 이야기 중 가장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아프리카 콩고를 방문하였을 때 아프리카에 도전한 기업으로 대우의 이야기를 많이 들은 바 있다.
장보고의 발자취를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국제적인 통상, 사업, 무역, 그리고 내부적인 산업으로 뒷받침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 세종시, 4대강사업 등 국내 사업으로 국민의 의견이 분열된 상항에서 장보고 이야기는 국민들에게 넓은 시각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