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읽고 한마디

중국이 본 9개 나라의 흥망사 (옮긴 글 포함)

공석환 2009. 10. 31. 16:19

지금 중국은 최근 세계역사를 좌우하였던 국가들을 연구하면서 과거 세계 최강국이었던 위치를 다시 찾으려고 하고 있다. 아래 소개하는 중국 cctv에서 방영한 "대국굴기"의 내용을 삼성 등 국내 유수기업도 장기적인 기업 전략을 수립하는 데 참고한 것으로 듣고 있다.
 
중국이 등소평 주석시절에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국가위주의 경제개발 계획을 참고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게 우리나라는 주변에 있는 소국에 지나지 아니한다. 최근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일 삼국 정상회담에서 외교적인 상례대로 삼각으로 앉은 것이 아니라, 중국 주석이 한면에 앉고 나머지 면에 한일.  정상을 배치한 것은 중국이 이제 한국. 일본을 내려 볼 수 있다는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MB가 대통령에 압도적인 국민의 지지를 받고 당선되었을 때,  대다수 국민은 MB의 기업경영 경험에서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을 강화시킬 최선의 인물로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MB는 이 중요한 시기에 국민을 통합 단결하여 한 마음으로 국가 경제발전에 동참하게 하기 보다는  4대강사업에 집착하여 국민을 분열시키고 있다.


중국이 세계역사에 큰 역할을 한 국가들의 행적을 되새겨 보면서 큰 시각을 가지려 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나라는 우물안 개구리처럼 세종시, 4대강사업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국론이 분열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보의 설치나 준설을 위주로 하는 4대강사업은 해외에 기술을 수출할 것도 아닌 단순한 토목 공사라는 점에서 장기적인 국가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지 아니한다. MB가 지금 형태로 4대강의 강바닥 모래나 파내는 것에 집착하면 그는 대통령이 아니라 일개 공사장 사업단장의 역할만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번 재보선의 결과는 중립지역인 경기나 충청지역에서 여당이 참패를 하였다는 점에서 국민이 MB와 여당에 주는 중대한 경고인 것이다.

 
그러나 보선후에 나오는 MB나 한나라당의 반응은 한마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다. 

 

지금 국민은 MB가 우리나라를 세계 강국으로 이끌어 갈 확실한 비젼을 보여 주면서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적 절차에 의해 자연스럽게 통합하는 정치를 원한다. 그러나 지금 MB의 언행은 국가경쟁력 강화하고는 반대로 국민의 분열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 부강의 정신을 계승한 정당이다.  만약 MB가 계속 국민 대다수의 여론을 무시하고 나갈 경우 여당의 뜻있는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국가의 장래를 위해 진심으로 고언을 해야 할 것이다

 

 

원문은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dikang75&folder=4&list_id=11131756


 

얼마 전 중국 관영 텔레비전(CCTV)을 통해 방영된 다큐멘터리 '대국굴기'는 3년 여 준비 끝에 완성된 세계 주요국가의 흥망사를 다룬 역사물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21세기 중국의 새로운 비전 찾기의 일환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인데 그 내용이 중국인들의 주목을 받으며 중국사회의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생각에 젖어있는 중국인들이 다른 나라의 흥망사에 이처럼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례적인 사건임과 동시에 중국이 공식적으로 세계로 눈을 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1부: 해양시대(海洋時代) - 포르투갈,스페인 

15세기 유럽에서 가장 먼저 탄생한 두 민족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국가역량에 힘입어 항해모험을 펼쳤다. 엔리케 왕자의 진두지휘 하에 포르투갈의 대를 이은 항해가들은 대서양에서부터 남쪽으로 희망봉을 끼고 인도에 달하는 항로를 개척했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자금 지원을 받아 콜럼부스는 스페인을 대표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인류 최초의 지구순환 항해도를 완성한 후, 당시까지 분리되어 있던 세계는 지리적 대발견으로 완전한 세계로 연결되었고, 세계를 넘나드는 대국들도 이로써 탄생하게 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서로 경쟁하면서 세계를 양분하고, 새로운 항로와 식민약탈을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전세계에 식민제국이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16세기 상반기 무렵에는 그 세력이 최고조에 달해 제1 시기의 세계 최강국들이 되었다.그러나 수탈체제를 통해 신속하게 일어난 이 두 나라는 전쟁 중 자산을 낭비하였고, 상공업을 발전시키지 못해 급속도로 성장한 것과 같이 빠르게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결국 세계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2부: 소국 대업(小國大業) - 네덜란드 

서북유럽에 위치해 있으며, 면적은 베이징시의 2배 정도에 불과한 네덜란드는 조수가 넘나드는 습지와 호수라는 불리한 여건에서도 물고기를 잡아 이루어낸 가계를 중계무역으로 전환시켰고, 저렴한 가격의 선박 제조 및 유리한 지리적 위치와 굳은 상업적 신뢰를 바탕으로 중간상에서 원양항해의 투사로 변해갔다.

날로 부유해지는 네덜란드 시민들은 귀족들에게서 도시자치권을 사들였고, 상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지방연합 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들은 세계 최초로 공동 출자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당시 전세계 무역의 절반을 독점했고, 세계 최초의 주식거래소를 설립해 자본시장을 탄생시켰다. 현대적 은행을 최초로 만들어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대적 신용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러한 일련의 현대 금융과 상업제도의 구축을 통해 17세기는 네덜란드의 세기가 되었다. 국토 면적、인구 등 천연자원이 부족해, 17세기 말, 네덜란드는 세계 각지의 패권을 잃어갔지만, 지금까지도 네덜란드인의 삶은 여전히 부유하고 그들이 세운 상업원리는 여전히 전세계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3부: 현대화를 향해(走向現代) - 영국(16~17세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유럽대륙과 마주보고 있는 영국은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세계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중세기부터 현대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주제가 관건이 되었다.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해양탐험과 무역을 장려하고, 낙관적 통치이념과 사회적 문제들을 타협적 수단으로 처리하면서 변방의 섬나라를 찬란한 발전 시기로 인도 하였다. 그러나 뒤를 이은 찰스 1세 국왕은 군권신수설을 신봉해 13세기 대헌장이 규정한 '국왕은 반드시 법률 규정을 준수해야한다'는 것을 위배하고, 화의 기간 중 4년간에 걸친 내전을 벌였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형에 처해졌다. 결국, 영국은 명예혁명을 통해 군주입헌제를 설립하고 현대사회로 나아가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상대적으로 관대한 사회분위기는 영국의 경제발전에 좋은 여건을 마련해주어, 산업혁명을 준비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동시에 이 섬나라가 세계무대 중심위치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었다.

 

4부: 공업 우선(工業先聲) - 영국(18-19세기) 

영국의 식민 확장과 해외시장의 성숙으로 상품 수요량이 점점 확대되었고, 수공업 공장의 생산으로는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발명과 창의를 장려하기 위해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특허법>을 제정했다. 이런 상황은 영국이 전 국민이 발명과 생산, 무역에 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후, 과학정신은 영국사회로 침투해 들어갔고, 와트가 증기기관으로 가장 핵심적인 동력문제를 해결한 후, 영국의 공업화는 놀라운 속도로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으로 자유경쟁의 시장규칙을 제시한 후 영국인들은 자국의 강력한 공업능력으로 자유무역을 추진하고 글로벌시장을 개척했다. 각종 조건의 성숙으로 영국은 세계 최초의 공업화 대국이 되었다. 이 기간 영국은 강력한 이웃인 프랑스를 물리치고 세계 최대의 식민제국이 되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식민지는 오히려 대영제국의 부담이 되기 시작했고, 자유시장경제의 폐단도 점차적으로 드러나 영국의 발전은 느려지게 되었고, 결국 세계 패권국가주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5부: 격정의 세월(激情歲月) - 프랑스 

17세기, 국왕 루이 14세는 프랑스에서 유럽대륙 최강의 절대왕권을 수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프랑스를 경제, 문화, 군사력 모두 역사상 최강의 위치에 올렸다. 문화의 도시 파리도 그 시기에 탄생되었다. 루이 14세의 문화예술에 대한 애착은 국민들의 사상문화의 숭배의 풍토를 조성했고, 전 유럽으로 퍼지기 시작한 계몽사상이 프랑스에도 널리 전파되었다.

계몽사상은 중세기 유럽의 신학으로부터의 속박을 타파하고 이성적 문호를 개창했으나, 프랑스 사회가 해결하지 못하는 3계층간 모순이 날로 심각해져 갔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폭발,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유럽 각 군주국가의 몰락은 프랑스에 극단적 사건과 장기적 동요를 초래했다. 이 시기 나폴레옹이 '대혁명의 아들'의 이미지로 나타나, 유럽을 정복해 나가면서 또다시 프랑스를 정상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무력 확장만으로는 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도록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2차대전까지, 프랑스는 독립, 자주의 노선으로 과거의 영광을 다시 회복했다.

 

6부: 제국 춘추(帝國春秋) - 독일 

유럽 각국이 민족국가를 형성할 때, 유럽 대륙 중부에 위치한 독일은 분열 상태에 놓여 있었고, 이로 인해 독일 국민들은 통일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경제를 통일함으로써 정치 통일을 이루자는 경제학자 린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관세동맹이 설립되고 무역장벽이 무너졌으며 독일경제 발전이 가속화 되었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유럽열강의 틈새에서 생존을 도모하며, 외교적으로 충분히 준비를 마친 후 3차례의 대외전쟁을 거쳐 1871년 독일통일을 이루어내었다. 그는 유럽대국의 균형원칙을 준수, 독일이 평화롭게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교육, 과학기술을 중시해 온 독일은 신속하게 2차 산업혁명의 선봉에 섰고, 30여 만에 영국을 추월하고 유럽 최대 세계 2대 경제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원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다시 분열되었으나,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을 통해 독일은 평화적 방식으로 국가 재통일을 이뤄냈다.

 

7부: 백년 유신(百年維新) - 일본 

150여 년 전 미국 함선 4척의 위협으로, 장기간 통상무역을 거부했던 섬나라 일본은 전쟁을 거치지 않고 나라를 개방하는 길을 선택했다. 외부 압력은 국가 내부변혁의 동력이 되었고, 미국 함선 진입 15년 후인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세계에서 지식을 얻는다’는 유신강령의 지도 아래, 일본은 정부 고위관리로 이루어진 사절단을 유럽과 미주 각국으로 보내 시찰을 시켰다. 그 후 일본은 국가 공업화를 시작했고, 다이큐호는 취사선택 방식으로 식민흥업을 추진하고, 문명개화 했으며, 대량의 국영공장을 건설하고, 민영기업을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일본 현대기업의 아버지 시부자와 에이찌가 관직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한 전설적 경험은 그 시대의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다이큐호의 계승자 이토 히로부미는 국내 자유민권운동의 목소리에 순응해 유신성과를 공고히 하는 제1헌법을 제정했지만, 동시에 천황이 일본 군국주의를 공고히 하는 바탕이 되었다.

다른 전제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일본은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군국주의의 꿈을 종식하였다. 2차대전 후 일본은 <평화헌법>을 기초로, 미국의 지지 하에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했다. 이로써 1968년 메이지 유신 100년 되던 해 미국과 소련의 뒤를 이은 경제강국이 될 수 있었다.

 

8부: 강대국을 향한 모색(尋道圖强) - 러시아 

1679년 러시아 피터 대제는 유럽각국을 돌아다니며 학습을 하고, 귀국 후 강경한 수단으로 사회변혁을 추진했다. 의식주부터 과학교육, 상업활동, 군대건설까지 비민주적 방식으로 러시아의 문명발전을 추진했고, 심지어 개혁을 반대하는 황태자를 직접 처벌하기도 했다. 강적 스웨덴을 물리치고, 유럽의 새로운 수도 상테페테스부르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그의 개혁을 계승한 예카테리나 2세 여왕은 유럽의 계몽사상을 들여오고, 교육을 중시하였으며, 기초법률 제정을 시도했다. 여왕의 업적은 결국 영토확장에서만 나타나, 18세기 후기, 러시아 영토는 유럽、아시아、미국을 넘는 대국이 되었고, 유럽 사무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농권제는 러시아가 경제, 기술영역에서 공업화를 이룬 영국·프랑스 등 국가에 비해 낙후되게 만들었다. 전쟁 - 혁명 - 개혁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 가운데 전통과 현대 사이를 배회하던 러시아는 서서히 자신들만의 사고방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톨스토이 등 러시아 지식인들은 국가의 정체성을 찾기를 희망했고, 이러한 노력으로 러시아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명을 창조해내게 되었다.

 

9부: 급변하는 정세 속의 새로운 노선(風云新途 ) - 소련 

1917년 소비에트 정권은 10월 혁명 후 탄생되었다.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노선을 시행하면서 레닌은 현실적 필요에 따라,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신경제정책으로 전환시켜 농민을 보호하고, 헤머, 포드 등 외국 투자자들을 끌여들여 소련 경제를 점차 회복시켰다.

레닌 사망 후 폐쇄와 전쟁위협에 직면한 국제환경에서, 스탈린은 공업화를 가속화시키기로 하고, 계획경제를 도입,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켰다. 두 차례에 걸친 5개년 계획을 완성하면서 소련은 단번에 산업 강국으로 도약했고, 당시 경제위기에 놓여있던 유럽과 미주 대륙 각국을 놀라게 했다.

이런 산업화의 괄목할만한 성과는 소련의 지령적 계획경제 모델의 폐단까지도 가릴 수 있었다. 곧 이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 신공업의 위력과 소련 국민의 희생이 전쟁의 승리를 이끌어 냈고, 책임 있는 대국이 지녀야할 지위를 갖게 만들어 주었다.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소련의 성공은 전 인류에 새로운 경험과 사고를 제공하였다. 오늘도 러시아인들은 민족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 민족의 미래는 기대해 볼 만하다.

 


 

10부: 새 나라, 새 꿈(新國新夢) - 미국(17C-19C)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영국 청교도 100여 명을 싣고 북미대륙에 도착했다. 대륙에 오르기 전에 서명했던 <메이플라워호 공약>에 따라, 청교도들은 신대륙에서 자치 생활을 했다. 100여 년 후, 대영제국이 세금 징수를 강행으로 식민지 독립전쟁이 시작되었고, 1776년 북미 13개 식민지는 미합중국 독립을 선언했으며, 1787년 미국 발전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성문헌법을 제정하고 중앙정부를 설립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대량 이민이 유럽 선진기술을 가져왔고, 이 기술을 바탕으로 미국은 신속하게 제1차 산업혁명을 완성했다.

미국은 신속하게 발전했지만, 제헌회의에서 해결하지 못한 노예제 문제가 결국 1860년 내전을 야기 시켰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에서 북부를 인솔하며 승리를 거두었고, 이로써 국가통일을 이룩하고 강력한 중앙정부를 이루었다. 정부 추진 하에 한 세기를 지속해온 서부진출 역시 성과를 보였다. 이후 에디슨의 전기발명으로 미국은 그 분야에서 앞서 나가게 되었고, 발명과 창조의 제도적 보장은 미국의 지속적인 발전 동력이 되고 있다. 1894년 미국은 세계 제1의 경제 강국이 되었다. 이 젊은 나라는 제2차 산업혁명의 선봉에 서 있었다.

 

11부: 위기의 뉴딜 정책(危局新政) - 미국(20세기 초- 2차대전 종식) 

자유경쟁은 미국이 19세기말 20세기 초 황금시대를 맞게 해주었다. 독점기업과 대형그룹이 연이어 출현했는데, 첫 트러스트 그룹인 록펠러의 스탠더드 석유회사는 그 중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점도 빠른 속도로 두드러져 독점은 중소기업 도산을 야기하고, 기회평등을 상실케 했으며, 사회는 심각하게 양분화 되었고, 노사모순이 격화되었다. 미국인은 이러한 경제사회 발전모델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1901년 취임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진보주의 사상과 사회의 요구에 따라, 반독점과 노동자 권익 입법보장법류 등을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정부가 경제에 관여했다.

그 후 포드 어셈블리 라인의 탄생, 전기시대 신기술과 발명의 출현 및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 활황 등이 미국 경제를 더욱 발전시켰다.

1929년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가 경제위기에 직면했을 때, 미국의 손실 또한 참담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정부의 경제 통제의 폭을 넓히고, 일련의 뉴딜 정책들을 통해 미국이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만들었고, 정부의 보이는 손과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함께 경제에 작용하는 혼합경제의 모델을 창출해 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 역사상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 미국은 정치, 경제, 과학기술, 군사 등 영역에서 세계 제1강국이 되었고, 세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12부: 정도를 위한 사고(大道行思) 

(1) 강대국의 수수께끼

500여 년 동안의 각 세계 강대국 발전과정을 돌이켜 보고, 대국 궐기의 핵심적 요소를 논의해 보면 한 나라만의 특정 상황에 맞는 요소들도 있겠지만, 일부 공통된 요소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과학과 교육중시, 자국 국정에 맞는 정치경제 제도 건설, 단순히 타국의 길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 자국의 상황에 맞는 정책도입, 국가역량 주도 아래 현대화 진전의 가속화 등이다.

 

(2) 대국의 현혹

역사적으로 대국이 식민지 약탈과 무력 패권으로 발전하게 되는 경우 결말이 좋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전쟁으로 문제점을 타파하고 재건하고자 기도하는 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독일의 흥망이 가장 좋은 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영원한 패권 국가는 없으며, 대국의 흥망이 교체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법칙이다. 한 예로 영국 역시 2세기 동안이나 전 세계를 주도하였으나 이러한 역사적 법칙을 피해 갈 수 없었다.

 

(3) 대국의 길

2차 세계대전 후 각국은 이성적으로 대국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다국적 기업을 통해 경제 발전을 실현했고, 미국은 정보혁명과 하이테크기술 영역에서 국가 지속발전을 이루었다.

글로벌 시장이 세계를 긴밀하게 연결시켰고, 대국 간의 상호 호응, 협력과 의존관계가 강화되기 시작했으며, 역사적 안목과 전략적 지혜를 가진 국가는 이성적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경제 글로벌화와 지역 블럭화의 시대조류 속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손을 잡고 시작한 유럽의 새 질서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고, 유럽연합(EU)은 평화롭고 협력된 국가발전모델에 시대적 획을 그었다.

 

(4) 대국의 사고

이상적 대국에 대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강대국이라는 화제에 대한 논의는 아마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21세기의 변화가 대국을 어디로 이끌고 갈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원히 평화롭고 공동 번영하는 화합세계가 인류 공동노력의 방향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글은 유민 해외홍보원 외신팀장과 한재혁 주 상하이 홍보관이 쓴 것을 편집 정리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