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경제 회복이 중국 및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권에서 가장 빨리 일어나고 있다. 10년 내에 동북아시아권이 세계 경제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현재가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한 장기적인 국가와 민족 발전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국민들이 큰 비젼을 가져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동북아시아에서의 큰 역사의 흐름과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뿌리를 살펴 보고 우리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여 우리 민족이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자부심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일찍 중국의 중심에 정착하여 농경을 시작한 한(漢)족과 유목생활을 주로 한 아시아 북방민족 들과의 투쟁과 융합의 연속이다.
한(漢)족의 원래 뿌리는 남방에서 이전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북경부근에서 북경원인 등이 발견되었지만 그 것이 현재 중국인의 선조라고 보지 아니하는 것이 다수의 견해이다. 현생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시작하여 약 3-5만전쯤 다시 전세계로 펴져 나갔다는 것이다.
중국 한(漢)족이 쓰는 중국어는 티벳, 버마, 타이어와 연결된 남방언어로 접미사 없이 단어의 순서로만 문법적 기능이 표시되어 '고립어'라고 분류된다. 접미사가 있어 문법적 기능을 하여 '교착어'라고 불리우는 우랄 알타이어와 중국어는 어순에도 뚜렷이 구별된다. 주어 동사의 순서가 어형이 변화하여 '굴절어'라고 불리우는 인도 유럽어와 유사한 것이다.
이러한 중국 티벳어의 분포로 보아 중국 한(漢)족의 뿌리는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 황하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국 한족이 중국에 정착한 후 황하문명이라는 고대 문명을 이루게 된다. 은나라라는 고대국가에서 지금 한자의 원류가 되는 문자도 만들고 정교한 청동기 문화를 이룬다.
은나라나 그 이후 주나라는 봉건적인 국가로 소국이 분립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여 중국 중심부가 하나의 국가로 된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처음 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만리장성은 남방의 농경민족과 북방의 유목민족의 대립을 상징하는 것이다.
북방민족은 여러 갈래가 있었다. 크게 서북아시아 계통인 몽고족과 동북아시아 퉁그스 계통으로 나뉜다. 그러나 몽고족과 퉁그스족은 접미사가 있어 문법적 기능을 하여 '교착어'라고 불리우는 우랄 알타이어를 사용하며 혈연적으로 가까운 관계에 있다. 거란족처럼 몽고계와 퉁그스계의 중간적인 위치의 민족도 있었다.
북방민족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중국의 사료에서 찾아야 한다. 북방민족의 침입에 시달렸기 때문에 중국인이 북방민족을 부르는 흉노, 선비, 동이, 동호 라는 표현이 오랑케 라는 뜻의 비하적인 표현이다.
중국 역사에서 춘추전국시대서부터 등장하는 흉노족은 중앙아시아서부터 몽고까지 걸쳐 넓은 지역에서 주로 유목생활을 한 민족이다. 지금 몽고, 터키, 헝가리가 흉노족을 자신의 조상이라고 생각한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게 된 것도 흉노족에 대한 방위를 위한 것이다.
전한을 세운 고조도 흉노와 전쟁을 하였으나 참패를 하여 공주와 조공물을 흉노에게 받치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기원전 141년에 즉위한 전한의 무제에 들어 와서 중국 한(漢)족은 공세적인 입장을 취한다.
로마 등 서양과 무역의 통로였던 서역을 점령하여 흉노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런데 그 때 일부 흉노족이 서양으로 이동하여 훈족으로 불리우며 잔인한 약탈로 게르만 민족을 서로마제국 영토 안으로 이동하게 하여 결국 서로마제국의 멸망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본다.
흉노족을 인도유럽계로 생각하는 견해도 있다. 생물학적으로 서방의 흉노는 위치상으로 서양민족과 일부 혼혈이 생겼을 것은 당연하다. 특히 파르티아전에서 패배한 로마병이 흉노족에 용병으로 왔다가 전하여 준 로마식 유리그릇이 신라에도 전하여 지고 일부 조각상에도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훈족에 대한 묘사를 보면 눈이 작고 찢어졌다 는 표현에서 훈족은 기본적인 혈통이 눈이 작은 북방 아시아계통의 민족임이 확실한 것이다.
한무제는 흉노뿐 아니라 동족에 위치한 북방민족인 동이족에 대해서도 견제를 한다. 고조선을 침입하여 한사군을 세운 것이다.
그 이후에도 북방민족은 계속하여 중원이라고 불리우는 중국 중심으로 이동하였다. 북방민족중에는 몽고와 퉁구스계의 중간인 선비민족이 세운 북위의 효문제처럼 자기 문화나 성씨를 버리고 중국문화에 동화를 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땅을 농민에게 균등히 나누어 주는 균전제를 실시하여 중국경제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반면 원나라(몽고)는 자기 문화 및 체재를 유지하면서 지배층도 몽고사람만을 중용하면서 중국을 지배하였다. 오히려 중국 한족에게 몽고식의 이름이나 복장 들을 하도록 하였다.
청나라는 만주 북방 여진족이 세운 나라로 자기 언어 및 문화를 지켜 가면서 중국을 지배하다가 중국 한족을 관리로 등용하면서 점차 중국 한족에 동화되어 갔다. 청나라는 그 영토를 티벳 몽고까지 넓혀 지금 현재 중국의 영토로 확장시킨 것이다.
정리하면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단순히 중국의 한(漢)족이 주도하였다고 보기 보다는 북방민족과 대립 융화, 타협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동북아시아에서의 역할은 사실 그리 큰 것은 아니다. 고조선이나 고구려에 한나라, 수, 당이 대규모 병력으로 침입하여 온 것은 당시 중국과 대립관계로 있으면서 고조선이나 고구려가 상당한 세력을 가져서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민족의 뿌리에 대해 과거에는 고조선으로부터 부여,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로 내려오는 것이 정설로 여겨 졌다.
최근 신라의 왕족이 중국 서북방 민족이었던 '훈' 또는 '흉노'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의견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과거 신라왕릉에서 출토된 왕관의 양식, 마구에 그려진 천마총, 적석목관총 등의 기원과 관련하여 일부 주장되었던 것이다. 특히 위 사진에 보이는 신라고분에 출토된 토우 기마인물상(국보제91호)에 말 안장 뒤에 청동기가 보이는데 이 것이 훈족이 장기 이동에서 취사도구로 사용하는 청동기를 말 안장 뒤에 가지고 이동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의견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새로이 다시 조명되고 있는 것은 탁본으로만 전해지던 문무왕릉비의 상단부가 발견되면서 그 내용에 문무왕 자신은 투후의 7대손인 성한왕의 15대손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투후란 사람은 한무제가 흉노족을 정벌할때 포로로 잡힌 흉노족왕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였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고조선, 고구려, 백제의 뿌리는 중국사람이 동이라고 부르던 부여계로 지칭되는 것인데, 흉노계통이 지배층인 신라가 대립관계로 있다가 신라의 삼국통일로 우리민족의 지배층은 고조선계가 아닌 흉노계통이었다는 견해도 보인다.
그러나 서쪽에 위치한 북방민족이 흉노, 동쪽에 위치한 북방민족은 동호, 동이, 거란, 선비 등으로 중국 한(漢)족이 불렀지만 양쪽 북방민족이 사실 생물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매우 가까운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거리 상으로 보면 감숙 등 서부 지역과 연해주까지가 많이 분리된 것으로 보이지만 북방민족이 유목민으로 말을 타고 신속히 이동하는 것에 능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몽고(원)시절 통일된 북방민족은 서로 같이 통합될 수도 있는 사이인 것이다.
결국 고조선, 고구려, 백제가 퉁구스 계통의 부여족에서 유래한 동북방계열의 지배층이 있었고 신라가 흉노 즉 서북방계열의 지배층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고구려의 광개토왕때는 고구려가 신라를 돕기 위해 당시 대군인 5만을 동원하여 백제와 일본의 연합군을 물리친 것을 보더라도 동북방계열과 서북방계열이 큰 차이를 두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중심의 관점에서 서북방민족을 흉노라고 부르면 야만족 취급하였지만 그 민족은 북방 아시아 척박한 영토에서 끈질긴 생존력을 가지고 동서양의 무역에 깊이 관련한 진취적인 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백제나 고구려계의 유민이 이땅에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일부 왕족들이나 지도층은 해외로 도피하거나 심지어는 당나라에 의해 잡혀갈 수 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부여의 후손들도 통일신라에 같이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뿌리는 몽고계통과 부여의 북방계통의 민족이 지배층으로 혼합된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최근의 유전자 검사 결과 우리민족의 유전자가 Y염색체에 나타나는 것은 북방계통이 우세하고, 모계는 상당히 남방계통이 섞인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이러한 것은 북방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지배층으로 되어 한반도에서 원래 살던 남방계의 여자들을 취하여 자손을 퍼트린 결과라고 본다.
고려의 시조 왕건도 신라 호족출신으로 기본적으로는 신라의 지배층이었으나 국가를 세운뒤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고려라고 국호를 지었다. 그리고 실제 우리 민족의 고토인 만주 지역에 대한 수복계획도 고려 시대에 시도된 바 있다. 이러한 사실도 훈이나 부여 계통의 북방민족을 별개로 볼 것이 아니라 가까운 혈연관계로 보아야 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고려는 원(몽고)와 30년 항쟁을 한다. 그만큼 대외적으로 강경한 기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몽고와 화친을 맺은 후에 고려는 원으로부터 부마국으로서 다른 정복지보다 특혜적인 대우를 받는다. 이러한 것이 우리 민족과 몽고 북방민족과의 혈연적인 관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려말 원이 쇠하면서 명이 중원을 차지하는 시기에 조선의 시조인 이성계가 여진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고려에 들어와서 장군노릇을 한다. 그런데 요동정벌을 나가다가 압록강 접경인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여 고려 왕조를 멸하고 조선왕조를 만들었다. 사실 이성계는 거의 여진족에 동화되고도 다시 고려의 군사적 중요한 자리에 중용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민족과 여진족의 관계가 아주 멀지 아니하였다는 증거이다.
사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것은 많은 아쉬움을 준다. 왜구의 침공 우려, 여름으로서 전투가 하기 힘든 상황, 소국이 대국을 치는 것이 불가 등 4가지 이유를 들어 회군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 체재가 안정되지 않고 원나라가 혼란에 빠진 유리한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고토인 요동땅을 회복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조선왕조에서는 무신들의 힘을 약화하고 유교교육을 받은 문관위주의 체제를 만들어 유지한 것이다. 그 결과 과거 제도를 통하여 교육을 강조하는 습관이 지금까지도 내려오지만 상대적으로 무신적인 기질이 줄어들면서 일본, 청나라 들의 외환에 적절히 대응치 못하고 큰 피해를 본 것이다.
우리가 북방 유목민 피를 받은 결과가 부정적이라고만 생각하지 아니한다. 즉 우리의 기업문화 등이 소위 기동성을 발휘하여 변화하는 세계정세에 빨리 적응하는 민족이 된 것이다. 반면 조선시대의 유교교육의 장점으로 교육을 중시하는 것으로 우리 민족은 문무를 겸비할 수 있는 민족으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될 것이다.
그리고 북방민족의 뿌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본토나 일본과도 문화적 교류를 많이 가지면서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가져 왔던 것도 동북아에서 장점이 될 수 있다. 과거의 역사적 배경과 지정학적인 위치로부터 동북아의 물류, 문화 의 교류 중심지가 되는 것을 노력해 볼만 하다.
다만 신라에서, 고려, 조선 등으로 왕조의 변화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 사회모순을 해결하지 못하였을 때 사실상 지배세력을 내부적으로 바꾸는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것을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 하여 동양사에서 널리 인정한다.
그리고 동양역사에 일본은 중세까지 왜구 등으로 부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다 근세에 들어 서양에 문물을 개방하고 나서 2차 세계대전 중 아시아 전체를 전장터로 만드는 등 좋던 나쁘던 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서양세계에서 시민 혁명 등이 일어나면서 사회의 급격한 변화가 있을 때 조선말기에 외부변화에 적절히 대응 못하고 유교 관료들이 민중의 어려움을 해결하여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내부적인 혁신이나 역성혁명이 일어나지 못한 연유로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그 후 일본 식민지배 하에서 독립운동을 한 많은 지사들은 독립후 조선왕조의 회복을 원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새로운 사회창조를 원한 것이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서 보이는 역사관에서도 조선왕조가 결국 기득권층과 일반 민중과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였다는 취지가 강하게 표시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힘으로 독립을 이룬 것이 아니고 미국과 소련의 힘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정권이 세워지면서 다시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전쟁이라는 비참한 민족상쟁 및 지금도 우리나라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격렬한 대립 그리고 남북의 긴장상태는 우리 자신이 해결해야 될 문제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민족의 장점을 살리면서 화합을 하여 전세계에서도 자랑스러운 민족이 되기 위한 방법과 비젼을 현재 대한민국의 지도층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리하면 한민족은 북방민족의 진취적인 기상을 가지면서도 교육을 중시하여 예술, 문무를 겸한 장점을 가진 민족이다. 그리고 신라 지배층의 기원과 관련한 흉노기원설도 흉노나 동이족이 멀리 보아서는 같은 뿌리를 가진 북방민족으로 큰 차이가 없다. 최근 중국의 부상이 무섭다. 미국과 함께 세계 초강국의 위상으로 나가고 있다. 한민족이 그 틈새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과거의 진취적인 장점을 살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계층, 지역 간의 분열을 조장하지 말고 다수 국민의 목소리를 겸허하게 듣고 국민을 화합 단결하는 길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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