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대 단과대 학도호국단 대표로 선임된 후 대학본부에서 다시 단과대 대표들이 모여서 대학전체 대표 선임건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자원자가 있었다. 경영대 대표로 나온 학생이 전체 대표를 맡겠다고 자원한 것이다.
사실 같은 이름은 아니라도 전에 학생회장을 하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자면 큰 돈이 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경영대 학생이니 학도호국단이라도 서울대 대표의 경력이 사회에 나가서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자원한 것 같다. 다른 자원자는 더 없어 그 학생이 대학 전체 대표를 맡고 아는 사람을 모집하여 본부 임원진을 결성하기로 했다.
그런데 회의를 시작하자 마자 제일 큰 문제가 학생회비 분배 문제였다. 당시 학생들이 내는 수업료에 학생회비가 의무적으로 포함되어 있었고 그렇게 징수된 돈을 본부 학도호국단과 각 단과대 학도호국단들이 분배하여 사용하는 것이었다. 감투를 맡을 때는 서로 미루던 학생들이 막상 돈이 걸리자 서로 다투어서 결론이 안 나는 것이었다.
본부에서는 전체 학생의 활동을 위해 돈을 많이 가져 가야 된다고 하고 단과대에서는 그 때 분위기상 본부가 움직여도 학생들의 호응이 없을 터이니 단과대에서 돈을 많이 써야 된다고 그랬다. 그리고 당시 단과대가 15개가 있었는데 음대, 미대는 전학년 거쳐 200명 정도의 미니 단과대이고, 공대는 전 학년이 2000명 자연대도 당시 의대 치대 1,2학년을 예과라 하여 같이 포함했기 때문에 1200명정도로 두번째로 학생수가 많았다.
돈의 출처를 생각하면 단과대별로 학생수로 비례해서 주어야 되는 것이 많겠지만 미니 단과대에서는 최소 조직운영비로서 얼마 이상을 보장해야 된다고 나서니 이 것 학도호국단 조직을 완성하고 나서 처음 열린 전체 회의에서 돈 싸움으로 진전이 안 나가는 것이었다.
내가 지켜 보다가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 타협안을 내었다. 6;4원칙이었다. 단과대 전체 예산 6, 그리고 본부 예산 4. 그리고 단과대에 배정된 예산을 다시 6:4로 나누어 6은 학생수에 비례 분배 나머지 4는 학생수 관계 없이 동등 분배로 하였다. 결국 내 안이 받아 들여졌다. 그리고 났더니 본부 회의할 때마다 예민한 사안이 생기면 서로 나를 처다 보게 되어 단과대 대표들 중에 다시 비공식 대표격이 되어 버렸다.
학도호국단 회의에 꼭 참석하셔서 진행을 도와주시면서 감시하시는 서울대 교무처 소속의 고등학교 교사 출신의 선생님이 계셨다. 그 해 즉 1980년 11월말경에 나를 따로 보자고 연락을 주셔서 대학교 교무처에서 뵈었더니, 문교부에서 학도호국단 임원들에게 수고가 많다고 각 대학별로 3명씩 해외시찰을 보내는데 나한테 갈 의사가 있냐는 것이었다.
즉 전체 대학교 대표, 본부 총무부장, 그리고 단과대 대표 중 1인을 고려하는데 내가 단과대 대표 중 가장 발언권이 세니까 이야기를 꺼내신 것이었다. 해외 시찰지역은 유럽, 일본 및 필리핀, 호주와 뉴질랜드 인데 전체 대표가 유럽을 가고 나한테 다른 두 군데 중 먼저 선택할 권리를 주신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지금은 대학생들이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갈 수 있지만 그 당시는 남학생의 경우 대학교 4학년 때 징병검사를 받아 병역 면제 사유로 판단되거나 아니면 대학 재학중 군대를 다녀 오지 아니한 경우 해외여행이 거의 어려웠었다. 물론 이 경우는 문교부 공식 파견이니 가능한 것이었다. 다른 단과대 대표들의 의견을 들어 보지 아니하고 혼자만 불려가서 제안받은 것이 미안하기는 했지만 해외여행을 해 보고 싶었다.
비행기 시간은 호주가 더 길지만 더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하여 일본을 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12월중순경에 아직 다른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중간에 일본10일, 필리핀6일의 해외여행을 다녀 오게 되었다.
평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일본의 첫 기착지인 오사카 상공에 다 달으니 야경이 장난이 아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입국을 하였다. 그 다음날 오사카 부립대학을 갔었는데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이 풍동이었다. 비행기를 제작하자면 유체역학 자료가 필요한데 충분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서 수십년간 실험을 하여 모아야 된다고 설명을 하였다. 그런데 그 풍동은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러한 데이터를 모아 일본이 2차세계대전에 전투기를 띄울 수 있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물리학을 하는 입장에서 학문이라는 것이 단숨에 되는 것이 아니라는 현장 실습이 되었다. 그 당시 여러대학에서 동행하여 40명 정도가 같이 움직였다. 다른 대학에서는 복학생들이 많아 나이도 많고 일어를 잘하는 분들도 있었었다.
그 다음날 쿄토를 가서 일본 명승유적을 보는데 절을 들어 가는데 목조 건물 높이가 30M 이상으로 우리나라 궁궐 건물보다 더 크게 위압적이었다. 동행한 모든 사람들이 다 위압되어 놀라는 표정을 지니까 가이드 하시는 분이 일본은 기온가 습도가 적당하여 나무가 크게 자라서 저렇게 큰 절을 지을 수 있었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절을 건축할 당시에 일본이 인력을 많이 동원할 수 있는 큰 힘이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쿄토의 유적에서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서 부여 공주에서 본 것과 유사한 느낌을 강하게 받아 일본 문화가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다음날 나고야까지 고속도로로 이동하였는데 고속도로 부근의 풍경이 너무나 한국하고 유사해서 외국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나고야에서 일박을 한 후 도쿄까지 신간선을 타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 기차는 달리면서 철로 끊어진 틈에서(여름에 철이 늘어나는 것을 고려하여 일부러 틈을 만듬) 주기적으로 쿵쿵 흔들리는 것에 익숙하였다. 그런데 신간선에서는 좌석 옆에 승객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선반에 물을 담아 컵을 나 두어도 달리는 동안 컵안에 물이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을 보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리나라와 일본과 기술 차이가 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기회가 되었다.
도쿄에 도착해서 자유시간을 받아 지하철도 타고 다니고 전자상가로 유명한 아키하바라를 가 보니 정말 없는 것이 없었다. 나는 전자제품은 구경만 하고 우리나라에서 당시 구하기 어려운 클래식 판들을 4장정도 사서 가지고 왔다가 나중에 졸업할 때 서울대 학생 음악 감상실에 기증하였다.
그 다음날 후지산이 보이는 하코네 관광이 있었다. 물론 후지산 부근의 경치가 이쁜 것도 인상깊지만 후지산 밑에 하코네 호수에 띄운 유람선이 완전히 네델란드 풍이었다. 일본사람들이 유럽을 동경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열흘 동안 일본의 중요도시인 오사카, 쿄토, 나고야, 도쿄, 후지산까지 가 보고 자유시간에 길거리도 직접 다녀 보아서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일본에 대해 직접 느껴 보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당시 찍은 사진은 아니고 .
김신묵의 해피투어 cafe.chosun.com/happytour 에서 전재한 사진이다. 그러나 그 때 모습과 유람선이나 풍경이 같다. |
일본을 마치고 필리핀으로 가서 6일간 머무르게 되었다. 필리핀 호텔에 들어 갔더니 일본의 호텔방 보다 3배 이상 커서 갑자기 별장에 온 느낌이 들었다. 그 때가 12월 말이었는데 밤에 야외수영장에서 전혀 춥다는 느낌을 받지 아니하고 수영을 해 보았더니 이제 열대에 있는 이국국가에 왔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필리핀에서는 미국과 일본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한 곳도 가보고 재래시장과 이멜다가 주인이라는 백화점도 가 보았는데 이미 우리나라 60년대를 연상시켰다. 밤에는 죽춤이라는 필리핀 민속 춤을 공연하는 것에서 맥주를 한 잔 하고 왔는데 우리나라 보다 물가가 1/3이하 느낌이었다.
50년 대에는 필리핀이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국가였다고 그러는데 이미 우리나라보다 후진국 티가 나는 것을 보고 박정희 대통령이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유신, 박대통령 암살에 따른 휴교에서 우을증에 걸릴 정도로 암울한 분위기를 느꼈는데 필리핀을 가 보게 된 것은 박대통령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게 되었다.
첫 해외여행에서 너무나 자극이 강하였다. 책에서 보는 것보다 실제 자기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것이 더 공부가 많이 되는 소중한 기회였다. 외국유학을 한국에서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가는 것도 전에는 고려하였으나, 위 여행을 끝나고 나서는 대학교 졸업 후에 나가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못한 공부를 보충하고 유학준비를 시작하기 위해 다시 고등학교 3학년 때와 같은 타이트한 생활를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