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

대학시절(1부)

공석환 2009. 6. 29. 02:46

고등학교 시절까지 우등생 노릇을 하다가 서울대 이공계열에 1978년에 입학하여 대학교 일학년 때 고민을 많이 하였다.  내가 고등학교 때 공부라고 생각하고 한 것은 공부가 아니었다 라는 생각이었다. 

 

길에 가다가 우연히 철장안에  바뀌를 달아 놓고 다람쥐가 열심히 돌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가 그러한 다람쥐와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공부라고 정해 놓은 “ 바뀌”를 주위 사람들의 칭찬에 신이 나서 열심히 돌린 것에 지나지 않다고 자책하였다


물론 고등학교 때 열심히 한 것이 전혀 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대 본고사를 잘 보기 위해 어려운 책으로 수학 과학을 미리 공부해 놓고 보니 대학교 1학년 때 듣는 수학, 물리, 화학이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서 그냥 놀고 가서 만점을 받고는 했다.  다만 대학교 1학년 때 국자로 시작하는 국어, 국민윤리, 국사 는 별로 좋지 않은 학점을 받았다.  교향과목으로 필수이기는 하였으나 들어 보니 천편 일률적으로 흥미를 주지 못하는 내용이라서 공부를 안 해 갔기 때문이다.

 

차라리 과목과 관계없는 책들을 읽기를 좋아 했고 친구 아버님인 김선기님의 충고로 세상을 넓게 공부한다는 첫 걸음으로 대학교 일학년 때 버트란드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영어 원본으로 만 1년만에 통독을 하였다.  그 책의 영어도 어렵지만 그 내용이 철학이라서 철학에 대한 기본 지식 없이 읽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였다.  그러나 너무나 좋은 경험으로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시 위 책을 찾아 한번 다시 읽어 보아야 겠다.

 

그런데 중학교 때 문학책을 많이 읽은 것이 도움이 되었다. 즉 그 문학책들에 내용에서 서양 역사와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많았던 것이다.  즉 중학교 때 니체의 “짜라투르스타는 이렇게 말했다”, 단테의 “신곡” 괴테의 “파우스트”, 등의 책들이  단순 문학 서적이라기 보다는 사상서에 가까웠던 것이다. 

 

대학교 일학년 여름방학에 다녀온 제주도 여행도 참 좋은 경험이었다. 지금은 김포공항에서 비행기 타고 1시간이면 제주공항에 도착하여 움직이니 경기도 여주가는 것 보다 더 편리하게 갈 수 가 있다.  그러나 1978년에 제주까지 비행기 항공료는 엄청나게 비쌌고 대학생 신분으로 선택할 방법은 목포에 기차타고 가서 배를 다시 갈아 타서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당시 목포까지 기차시간이 12시간, 다시 목포에서 제주까지 배가 8시간이 걸렸었다. 따라서 중간에 배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하면 가는데 하루반, 올 때 다시 하루반 왕복 3일을 잡아야 되는 여행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친구로서 가장 친하였던 2명의 친구와 같이 가게 되었다. 한 친구는 지금 고법부장(차관급)을 하고 다른 친구는 이대 교수를 하고 있다.  기말 시험끝나자 마자 6월말에 출발하였는데 역시 대학생 답게 텐트와 자취준비를 해가서 제주시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직행을 했다.  그런데 아직 6월말이 일러서 그런지 해수욕장이 정식 개장도 안하고 사람들이 거의 안보였다. 

 

 다음날 교통편이 별로 없고 당일로 하산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택시 대절하여 등산로 입구까지 가서 출발하여 백록담으로 향했다.  한라산은 다른 산에 비해서는 완만해서 등산의 재미는 없었다.  그래도 나무에 갇혀 있는 길을 올라가다가 백록담 직전에 환하게 트여 있는 것을 보니 마음도  트이는 것 같았다. 

 

막상 도착하여보니 장마가 시작되기 직전이라서 별로 물이 없었다. 이 것이 그 대단하다는 백록담인가 하도 불쌍해 보여서 물 좀 보태어 주고(?) 내려 왔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다시 시간 절약하기 위해 택시 대절하여 제주도 해안가를 일주하였다. 

 

서울만 살던 촌놈에게 제주 남쪽해안의 분위기는 외국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다음 날 판사가 된 친구가 치통으로 죽을 표정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오기 직전에 문제가 생겨서 치과 다녀와서 가자고 하는 것을 장마 시작되면 목포 제주간 배의 운항이 불확실하다고 내가 우겨서 그냥 강행하여 데려 왔는데 무리를 한 것이었다.

 

비록 백록담과 남쪽 해안을 보았어도 이 먼길을 와서 원래 예정은 닷새를 머물기로 했는데 제주도에서 이틀 만을 보내고  올라 가기에는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두 친구만 먼저 가라고 하고  사람도 별로 없는 외지의 해수욕장에 혼자 남았다. 

 

친구들 하고 같이 있을 때는 비록 낮에는 택시타고 점심을 사 먹었어도 아침 저녁은 코펠에 밥 하고 찌게를 끓여서  같이  먹었는데 혼자 남으니 해 먹을 염두가 나지 않아 사 먹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남자라도 혼자 사람도 없는 해수욕장에 텐트를 치고 자자니 밤에 잠도 잘 안오고 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홍대 미대 다니다가 중퇴하고 제주도에서 돼지 키우면서 그림 그린다는 몇 살 더 먹은 분을 만나 소주 한 잔 하고 그 다음날은 우연히 만난 제주대 학생하고 술 한잔하고 이틀을 혼자 묵었더니 도저히 못 견디기 어려워,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목포로 배를 탔다. 

 

그런데 배를 타고 목포로 떠나는 순간 그 동안 쾌청했던 날씨와는 달리 가랑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선실로 들어가지 않고 선창에서 가랑비를 맞으며 바다를 보니 그 것이 진짜 여행다운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인생에 아무리 가까운 친구나 반려자가 있어도 자신을 완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여행은 혼자할 때 느끼는 것이 많은 것 같다.  대학교 일학년 때의 제주도 여행은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 추억이다.

 

대학교 일학년을 마치고 과를 정해야 되는데 당시 이공계로 들어가서 공대를 가거나 아니면 수학, 물리, 화학, 통계, 천문학과 중에서 골라서 지원하게 되어 있었다. 경쟁자가 있는 경우 대학교 일학년 성적 90%와 입학성적 10%를 합쳐서 정하는 시스템이 적용되었다.  그런데 대학교 일학년을 마치고 수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논리적인 사고가 자기에게 더 맞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수학과 교수님도 따로 찾아 뵙고 상의를 하였는데 수학과를 지원하지 못하고 물리학과를 지원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당시 물리학과는 서울대에서도 공부를 잘한 수재가 지원하는 과로 평판이 있었고 실제 같이 입학고사를 치루어서 서울대 수석을 한 친구도 물리학과로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수학과는 좀 노는 분위기라는 평판이 있어 가서 분위기 상 같이 어울리다 보면 자기도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있다는 우려와 수학과를 다닌다고 할 때 좀 대학교 일학년 때 성적이 안 좋았던 학생으로 비칠 수 있다고 하는 자존심도 작용했던 것이다. 

 

만약 수학과를 진학했으면 나의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다.  얌전히 대학교수를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고, 외도를 하여 금융수학을 공부하여 헤지펀드 매니저를 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물리학과로 진학을 하고 보니 분위기가 대학교 일학년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대학교 일학년 때는 놀고도 성적을 잘 받았는데 이제는 숙제에 시달리고 새로운 것을 배우느냐고 정신이 없었다. 일학년 때 여유를 피고 지내던 것이 버릇이 되어 좀 고전을 하였다. 

 

과에서 학년별로 과대표를 뽑아  반장처럼 교수님에게 연락도 하고 혹시 과 MT를 가게 되면 준비도 하는데  그런데 우연히 물리학과 2학년 때 과대표를 하게 되었다. 서로 얼굴도 잘 모르는데 괜히 내 목소리가 커서  그런지 학생들 투표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이 것이 나중에  내 진로를  바꾸는 계기가 된다. 

 

 대학교 2학년 2학기 때 그야말로 큰 사건이 터진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계엄령이 내리고 갑자기 2달 가까이 휴교를 하였다가 다시 3학년 초에 개교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5월 들어 와서 당시 군부가 정권을 민간에게 이양하지 않고 군사정권을 연장한다는 이야기가 돌게 되었다.  그래서 전국의 대학이 들끓었다. 나는 비록 개인적으로 사상서는 많이 읽었어도 소위 운동권 학생들하고 어울리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런데 모든 학생들이 거의 서울대 본관 앞 광장 앞에 모여서 집회를 가지다가 시내로 나가자 하는 말에 걸어서 신림동을 거쳐 한강대교는 경찰이 철통처럼 지키고 있다고 하여 양화대교로 돌아 광화문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실권 없이 집무하고  있는 청와대로 진행하다가 경찰에 밀려 서울역으로 나오게 되었다.  어렸을 때 서울 중심가를 많이 걸어 다녀 보기는 했지만 그 때처럼 서울의 반을 도보로 걸어 본 것은 인생에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다시 경험해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서울역에서 행상들이 하는 이야기 즉 “어련히 잘 될 텐데 어린 학생들이 나서야 세상만 더 어지러워 지지” 하는 것을 듣고 갑자기 다리 힘이 쭉 빠져 버렸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집에 와서는 그 다음날 부터는 집회에 참석을 하지 아니 하였다.  소위 대세가 기울어 움직여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일 후 광주사태가 발생하였고 다시 계엄령이 내린 후 다시 학교도 무한정 휴교로 들어 가서 약 4개월간 다시 학교를 못 가게 되었다.  보통 대학교 2,3학년때  전공 공부에 기초를 쌓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공부가 제대로 되지를 아니하였다. 다시 유행하던 사상서 예를 들어 밀스의 “파워 엘리트”,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등의 책을 집에서 읽게 되었다.

 

물리학과 학년 과대표를 2학년 때만 하고 3학년때는 다른 사람이 했었는데 휴교 직전에 학생들이 단합하는 조직을 와해시킬 목적으로 과대표를 맡은 학생을 시위에 실제 관여 여부와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정학 조치를 서울대학교에서 내렸다.  지금 같으면 상상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휴교 중에 지도교수님에게 연락을 받고 부탁을 받게 된다.  정부에서 대학교 휴교를 푸는 조건으로 기존의 학생회를 없에고 학도호국단을 대체 조직으로 미리 만드는 것이 지시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래서 학도호국단의 과 대표가 기존의 과 대표와 같은 역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도교수님의 말씀이 그러한 조직의 과대표를 맡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고 전에 아무런 경력이 없는 사람이 맡는 것도 이상하니 내가 2학년 때 맡은 경력으로 좀 희생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맡아 달라고 부탁을 하셔서 거절하지 못하고 맡게 되었다. 

 

 그 직후 아직 군인들이 서울대 정문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에 학교정문에 신원과 용무를 확인하고 학교에 들어가서 자연대 학장보를 맡으신 교수님하고 각과에서 학도호국단 대표로 추천받은 학생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랬더니 학장보 교수님이 자연대 단과대학 대표를 선임하고 조직을 마련해야 된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도 단과대 대표를 맡겠다고 나서는 학생이 없었다.  다들 희생양으로 억지로 왔는데 말이다.  그랬더니 학장보 교수님 말씀이  학도호국단 조직을 만들어도 지금 학교 분위기상 활동도 없을 테니 부담 가지지 말고 형식상 조직을 만들자고 그러시는 것이다. 

 

 그래도 나서는 학생이 없자 학장보 교수님이 거부하기 어려운 제안을 하셨다.  각 과별로 학생수를 따져서 학생수 많은 과 순서로 중요한 자리를 맡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2학년 진학을 하면서 물리학과, 화학과, 수학과가 원래는 정원이 같은데 지원이 많은 과는 원래 정원보다 10%내에서 증원하고 지원이 적은 과는 반대로 10%로 이내에서 학생수를 줄여서, 물리학과가 제일 학생수가 많았다.  따라서 졸지에 학도호국단 자연대학 단과대표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제는 고생길로 접어 들었다. 단과대 대표가 되니 대학교 전체 대표회의에도 참석해야 되있다.  당시 단과대 학생회 일년 예산이 1500만원 이었는데 지금 물가로 생각하면 약 2억원 정도의 가치였던 것 같다.  각종 서클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 오는데 나중에 특혜를 주었다고 혹시 문제 될가 보아 지원금을 공정하게 분배한다고 수시로 각 서클하고 돈 문제로 다투는 것이 큰 일이 되었다. 따라서  물리학과 학생으로서 모범적으로 공부를 하기에는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았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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