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도 뒷마당에 사슴들이 자주 나온다. 위 사슴들 다 작년에 태어난 것들인데 작년에는 새끼로 귀엽더니, 어느새 성년이 되간다. 이제 중간에 있는 것은 뿔이 나기 시작한다. 사람으로 치면 대학생 나이 정도가 되가는 것 같다.
우선 대학교 입학 이전까지 이야기를 해 본다.
돌아가신 친조부는 강원도 철원의 휴전선 넘어 미수복 지구에서 일본 식민지 시대에 초등학교 교장을 하셨다.. 부친은 성년이 되는 21세까지 철원에 거주하시면서 중학교때 수학여행은 금강산으로 다녀 오셨다. 그러나 조부와 가까운 친척들이 해방이 된 후 남쪽으로 내려와서 아무 기반도 없이 정착을 하신 것이다.
부친은 3남 4녀의 두번째로 태어나서 조부가 학교 교장을 하시느냐고 여유가 안 되어 국민학교 졸업하고 즉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셨다. 친구 삼촌의 가게에서 일하시면서 독학을 하시다가 나중에 다시 중학교에 편입하여 고등학교까지 북한에서 마치셨다. 북한에서 교원연수를 받으시고 17세에 중학교 선생님을 하셨다. 남쪽으로 내려와서 군대를 지원하셔서 가신 후 북한에서 러시아어를 하신 것 때문에 군대 정보학교에서 어학을 가르치시다가 야간으로 지금은 영남대와 합쳐진 구 청구대학을 졸업하셨다.
부친은 술을 한잔 하시고 집에 오시면 환경이 되어 큰아버지처럼 중학교에 정상적으로 진학했으면 공부를 제대로 하였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항상 이야기 하시곤 했다. 참고로 큰아버지는 당시에 가장 엘리트들이 진학하던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오셔서 공무원 생활을 하셨다.
어머니는 서울서 어릴 때 사시다가 외조부가 어머니 11살에 돌아가신 후 당시는 경기도인 천호동 부근에서 외삼촌하고 같이 살게 되셨다. 외할머니가 청상과부로 어머니와 두살 위 언니인 이모 둘을 혼자서 키우시느냐고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가 천호동에서 왕십리 무학여고를 걸어서 다니셨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흉년이 들어 수업료를 못 내서 학교에 가도 수업은 못 받고 벌을 하루 종일 받다가 집으로 돌아 오게 되었다. 돌아 오는 길 광진교를 건너면서 나는 왜 이렇게 학교 다니기도 어려운가 비관하여 강물에 빠져 자살할가 하시는 충동을 느끼셨다고 한다.
결국 수업료를 내실 수 없어 중퇴를 하셨다가 한국전쟁 이후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고등학교 중퇴학력으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실 수가 있어 교사를 하시다가 다시 고등학교를 야간으로 마치셔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으셨다고 한다. 즉 부모님 두 분다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하시고 여건상 하고 싶은 공부를 다 할 수 없으셨기 때문에 나에게 공부에 대한 기대가 많으셨다.
어렸을 때 궁금한 것이 많아서 어른 들에게 많은 것을 물어 보다가 직접 해결하는 방안으로 유치원부터 제일 좋아한 책이 백과사전이었다. 단권이지만 어른들이 보는 것으로 작은 활자로 1500쪽이 넘는 백과사전을 그냥 통독하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15권으로 된 백과사전을 사서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다 읽었던 기억인 난다. 당연히 어렸을 때 별명이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초등학교 동창중에 가장 가까이 지낸 친구의 부친으로서 전에 문교부차관도 하시고 명지대 대학원장도 역임하신 김선기님이 계셨다. 친구 집에 들리면 바둑도 가르쳐 주시고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셨다. 가장 인상이 깊은 말씀이 ‘가장 행복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해 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본인이 언어학자로 학문이나 세상경험을 아주 넓게 하신 분이다. 그때 해 주신 말씀이 사실 나에게 인생의 신조처럼 되었다. 나중에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좋은 책을 추천해 주셨다.
어렸을 때 지금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을 좋아 하는 것처럼 바둑을 좋아 했다. 그 당시 시장이나 길에서 바둑판을 놓고 어른들이 두고 있는 것을 보면 구경하다 끼기도 했었다. 바둑실력이 갑자기 늘지는 않고 계속 나이 들어 서도 조금씩 급수가 올라 갔는데 지금은 한국기원에서 정식으로 받은 아마4단증을 가지고 있다.
부친이 군대를 중위로 제대하신 후 중소기업을 직접 하시면서 아직 사업에 어려움이 있어도 자녀 교육에는 신경을 많이 쓰셨다. 그러나 동네에 가보면 보리밥에 오이와 고추장만 넣어 비벼 먹어도 만족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1960년대 초기만 하더라도 주위에 아직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3년까지 동대문 뒤에 있는 종로구 창신동에서 살았는데 초등학교3학년에 가까운 공립학교에서 사립인 명지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여 멀리 통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학교에 스쿨버스가 있었지만 방과할 때는 남산서부터 동대문에 있는 집까지 걸어 오기를 좋아 했다. 친구들과 길거리를 걸어 오면서 보는 것이 운동도 되지만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그 당시 동대문 부근이 좀 삭막하여 장충단 공원을 거쳐 남산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 서울의 남산이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나중에 변호사를 하면서 외국 고객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서울을 간단히 구경시켜 주기 위해 남산타워를 오르면서 여기가 내 어렸을 때 놀던 놀이터(playground)라고 소개하곤 했다.
명지초등학교를 다니면서 특히 기억나는 것은 4학년 때 부여 부근의 백제 관광지를 수학여행가서 낙화암 등을 보고 온 것과 6학년 때 경주 및 부산에 수학여행 다녀 온 것이다. 동해 일출을 본다고 새벽에 일어나 토함산에 오른 후 석굴암의 균형잡인 부처님상을 본 것도 큰 자극이 되었다.
학교에서 가끔 현장학습이라 하여 인천 앞바다의 갯벌을 다녀 온 것이 좋았다. 공부는 책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보는 것이 더 머리 속에 남는 것 같다.
초등학교 때 낚시가 취미이신 아버지를 따라 당시 뚝섬이라고 불렸던 지금 성수동에서 아직 영동대교가 놓이기 전이라 배를 타고 건너와 지금 청담동에 건너 온 적이 있다. 아버지가 나이 드셔서 은퇴하시면 낚시를 하기 위해 오두막 짓고 지내신다고 영동대교 부근에 땅을 사 놓으시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영동지구라는 이름으로 내 중학교 때부터 강남구가 개발이 되었다. 아버지가 직접 집을 사람들에게 시켜 건축하여 중3때인 1974년에 강남에 이사를 와서 대학교 졸업하고 유학을 가기까지 부모님하고 청담동에 소재한 단독주택에서 살게 되었다.
처음 강남구에 이사 왔을 때 그 분위기는 지금 용인의 전원주택단지 분위기 였다. 압구정 현대 아파트 부근에는 배나무 밭이 많이 남아 있었고 향후 교통량 증가를 대비하여 도로는 넓게 잡아 놓았지만 당시에는 가운데 2차선만 포장이 되있었고 맨 가장자리 차선에 자전거 전용도로차선이 있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및 고등학교 일학년 때 자전거로 청담동에서 출발하여 강남지역 전체를 다니는 것이 운동이고 취미였다.
처음 이사왔을 때에 불편했던 것은 집이 강변쪽에 있었는데 대로까지 나가는 길에 일부 포장이 안되어 비 오는 날에는 진흙탕을 피하기 위해 장화를 신고 다녔어야 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강남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 때의 영동 지금 강남구는 매연도 없고 교통 혼잡은 당연히 없이 쾌적하였다. 그러나 지금 강남구에 나는 정을 가질 수 없다. 교통혼잡에 녹지는 적고 콘크리트 건물에 둘러 싸여 비즈니스 지역이라면 어울리겠지만 주거환경으로는 좋지 아니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 없어진 수도중학교에서 1학년 다닐때까지 고등학교 입시가 있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때에는 고등학교 입시에 대비하여 바빴다. 그런데 1학년 겨울방학에 갑자기 서울지역에 고등학교 무시험 평준화가 발표되어 중학교 2학년부터는 좀 여유있는 생활을 하였다.
중학교 때 사춘기 감수성이 많을 때라 을유문화사와 정음사에서 출간한 세계명작집들을 때때로 청계천에 나가서 단권으로 골라서 사다가 읽게 되었다. 통독한 첫 책이 도스토에프스키의 “사냥꾼의 일기”라는 소설이다. 저자가 사냥꾼으로 러시아 여러 지역을 돌아 다니면서 일어나는 일을 적은 책인데 러시아의 풍습등을 알 수 있는 그리 부담이 없으면서도 흥미있는 책이었다. 나중에 도스토에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도 중3때 통독을 하였다.
특히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전 2달동안의 겨울 방학때 그 동안 읽고 싶었으나 시간이 안되어 못 읽은 책을 30권을 구입하여 이틀에 한권씩 문학책만 읽고 지내었다. 딱딱한 문학책만 읽은 것이 아니라 내용상 음서에 가까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단테의 신곡,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좀 어려운 내용도 그때 읽었었다. 그러한 문학책을 읽은 것이 나중에도 상식을 넓히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1975년에 용산고등학교에 무시험으로 입학을 하고나니 고3학년 선배들은 시험 세대라 자부심이 강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진학하면서 문과 이과를 나누는 가운데 어렸을 때부터 과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이과로 가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일학기까지도 공부를 쉬엄 쉬엄하고 했다. 즉 학교 진도만 숙제하면서 따라가는 형태로 공부를 했었다
그러나 여름방학이 되면서 무엇인가 해 보고 싶어 참고서를 주요과목 위주로 국어, 영어, 수학 및 과학 일부의 참고서를 사서 학교 도서관에 도시락 두개를 싸가지고 가서 보통 때 학교 가는 것처럼 8시 정도에 가서 저녁 10시까지 보아서 과목별로 두권 정도의 참고서를 다 통독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일학기 까지는 이과에서 시험을 보면 1등에서 3등 사이를 왔다 갔다 했었는데 여름방학 이후로는 시험을 보면 2등하고 평균 15점 이상 차이 나는 압도적인 1등을 하였다.
그 이후로도 나는 과외 없이 학교 도서관에서 붙밖이로 박혀서 참고서로 자습을 하였다. 그리고 수업중에는 선생님들께서 다른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이미 공부한 것이기 때문에 참고서를 펴 놓고 그 과목을 선행하는 자습을 하였고 선생님들도 그 사정을 이해하셨다. 지금은 강남에 있는 학교들이 명문이지만 당시에는 과거 명문 공립학교 소위 4대공립학교(경기, 서울, 경복, 용산 등)이 비록 무시험으로 입학하였다 하더라도 전통이 있고 훌륭하신 선생님들이 많으셔서 아직도 명문으로 통하였다.
지금 수능과 비슷한 예비고사가 있고 대학마다 본고사가 따로 있어서 양쪽을 준비하여야 했다. 그런데 예비고사 준비를 위해 4대공립 및 다른 5개 공립학교 합쳐서 총 9개학교에서 모의 예비고사를 공동으로 출제하여 4번 보았는데 내가 3번을 일등하고 한번만 2등을 하였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전국 예비고사 수석을 기대하였다. 물론 나름대로는 서울대학교 본고사도 충실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예비고사에 체력장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좀 원래 운동신경이 둔한 편이라서 20점만점에서 3점을 감점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남보다 불리한 조건에서 예비고사 수석이 가능하겠냐는 실망을 하게 되었다. 그 해 치루어진 전국 예비고사에서 공립학교 공동 시험에서 단 한번 일등하였던 학생이 예비고사 수석을 하고 나는 체력장 감점의 여파로 전국에서 15등에 드는 것으로 끄쳤다. 그리고 서울대 본고사 수석도 노렸으나 이공계 차석으로 만족을 하여야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 공부 잘한다고 특혜를 받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당시 고등학교 학생은 스포츠 머리라고 하여 앞의 머리가 3cm내에서 기르게 학칙이 되어 있었다. 가끔 교문 앞에서 규율반이 검사를 하여 위반한 학생은 바리깡이라는 머리 깍는 기계로 가운데 중간 일부만을 소위 “고속도로”라 하여 벌칙으로 깎아 준다. 그러면 나중에 이발소에 가서 스님 머리처럼 다 밀을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이발소에 간지 좀 오래 되게 되면 의식적으로 기른 것이 아니라도 걸릴 수가 있게 되었다.
학교를 들어 가다가 교문에 규율반이 서서 머리를 검사한다고 그러기에 혹시 걸리면 귀찮다고 생각이 되어 용산고에 붙어 있는 용산중학교 정문을 거쳐 고등학교와 중학교 사이에 있는 쪽문을 지나 가는데 그 쪽문 앞에 고등학교 교감선생님이 딱 지키고 계신 것이었다. 그런데 서로 놀란 것이다. 교감선생님은 공부 잘하는 모범생인 내가 그 쪽으로 온다는 것에 의외였던 것이었다.
같이 지나 가던 다른 친구들이 이름이 적혀서 나중에 규율부로 불려가서 여러대 체벌을 맞았는데 나는 교감선생님에게 즉석에서 훈계만 듣고 사면되어 그냥 교실로 들어 갔더니 다른 친구들에게 영 미안한 것이었다. 차라리 매 몇 대 맞는 것이 낳지 공부 잘 한다고 특혜를 받은 것이 오히려 찜찜한 기분이었다.
서울대학교 진학할 때 의대에는 관심이 없었다. 과학자가 된다는 생각에 당시 공대와 자연과학을 합쳐 놓아 학생을 선발한 이공계로 입학한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잠자는 시간(평균 6시간 정도) 빼고는 공부만 하면서 과학자를 꿈꾸던 소년이 대학교에 가서는 박대통령의 시해 등 급격한 사회의 변동에 방황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