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

대학시절(3부)

공석환 2009. 7. 7. 15:36

나의 대학 시절에 박대통령의 암살 이후 정치적 혼란속에서 자신의 정체성 및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고민 속에서 나에게 항상 정신적 위안이 된 것은 음악 감상이었다.  서울대 학생회관 식당 옆에 15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클래식 음악감상실이 있었다.  물론 학생 복지 차원에서 무료이고 학생들이 DJ로 신청곡을 받아 틀어 주고 하였다.

 

대학에 입학을 할 때 클래식 음악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고등학교때 그야말로 학교 도서관에 박혀 공부벌레 노릇을 하였으니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점심 먹고 나서 졸릴 때 자판기 커피한잔 뽑아서 음악감상실에 가서 졸면서 음악을 듣다가 점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클래식음악과 명반에 관한 소개서도 사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교 일학년 때 과외수업을 가르쳐서 모은 돈으로 나름대로 오디오 세트도 장만을 하였다. 중고지만 피셔앰프에 개러드 턴테이블, ADS 모니터 스피커로 음질은 괜찮았다. 

 

 휴교시절에는 당시 좋은 판이 많고 오디오 기계도 한 수 위라고 하던 명동의 “필하모니” 음악감상실, 무교동에 있던 “르네상스” 음악감상실에 가서 3-4시간씩 졸면서 음악 들으면서 보냈었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 때에 서울대에 학생회관에 있는 음악감상실에 DJ로 자원하여 학생들 신청곡 중에서 선별하여 틀어주는 역할도 하였다.  그 당시에 시대적 분위기가 그래서인지 바하와 브람스를 주로 좋아 했다. 그리고 일찍 요절한 독일의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가 부른 슈만의 “시인의 사랑”도 좋아하는 곡이었다. 음악감상은 지금도 평생의 취미로 남아 아직도 집에 오면 머리를 식히러 음악을 듣는 것을 먼저 시작한다.
 
3학년때 2학기 중에 해외 여행을 다녀 와서 학업에 지장이 많았다. 나가기 전에 A의 성적이 되던 과목이 가있는 동안 숙제도 못하고  수업을 못 들었더니 기말시험을 망쳐서 B-를 간신히 받는 등 성적이 대학4학년 중에 최악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때 다녀 온  해외 여행은  나의 인생진로를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선 그 전에는 한국에서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를 받는 것도 고려하였는데 해외여행을 다녀 오고 나서 빨리 큰 물로 나가자고 결심하여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유학을 가는 방향으로 정하였다. 

 

시력이 나빠 신체검사에서 보충역 판정을 받아서 유학을 나갈 때 부담이 줄어 들었다. 그런데  학도호국단 활동과 여러 사회현상을 보면서 순수물리 보다는 다른 것을 해 보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렇다고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바꾸기는 너무 그렇고,  사람의 자유의지와 물리 법칙과의 관계 등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즉 물리법칙이 기계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사람의 자유의지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즉 물리와 생물의 존재와 자유의지와의 관계는 어떤 것일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학사도 졸업논문을 쓰게 되어 있는데 물리학과에서 과학철학 분야에 조예가 깊으신 장회익 교수님에게 지도를 받아 학사논문도 쓰면서 유학때 전공을 순수 물리가 아닌 생물물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대학교 4학년 때에는 화학과에 가서 생화학도 듣고, 생물학과에 가서 생물물리학 과목도 듣게 되었다.  그 때 생물물리학 강의를 하여 주신 홍영남 교수님 실험실에서 유학가기 전에 잠간 있었고 나중에 홍교수님은 내 결혼 주례도 해 주셨다.  

 

 그리고 물리학과 2학년 때 지도교수님이시고 안목이 넓으셔서 후에 과학기술부 장관도 하신 권숙일 교수님에게 대학원 진학할 때 학교에 대한 상담 및 추천장도 받았었다.  대학교 때 여러교수님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특히 위 세분에게  덕을 많이 받았다 .

 

  미국 대학원에 필요한 SAT, 토플 시험 준비도 하면서 성적에 신경을 쓰다 보니 대학교 4학년은 다시 고등학교 삼학년 시절과 같이 정신없이 공부만 하는 시절로 돌아 가게 되었다.  다만 고등학교 때는 문교부나 대학입시과정에 필요한 과목을 수동적으로 지정 받아 하였으나 대학교 4학년 때는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여 공부를 하였다는 큰 차이가 있었다. 

 

4학년 여름 방학에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미국 대학원에서 요구하는 GRE 시험에서 영어에서 미국 대학생 중 시험을 치룬 사람 중 상위 83% 그리고 한국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 하는 논리 분야에서는 미국 대학생 상위 90%의 성적을 받았다. 물론 수학은 만점을 받았다. 미국대학에서 생물물리학에서 유명한  대학 여섯 곳에 1982년 1월까지 원서를 접수해 놓고 그 결과를 4월까지 기다리게 되었다.

 

1982년 4월 버클리, 시카고, 유펜, 브랜다이스 네 군데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과정에  입학 허가통지를 받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미국의 대부분의 일류 대학에서는 자연과학의 경우 석사학위 없이도 박사학위 과정으로 지원한다.

 

그 시점에 다시 고민에 들어갔다.  생물물리학 분야에서나 전체 학교의 명성에서 버클리가 가장 위이기는 한데, 버클리에서는 학자금이나 생활비에 관한 장학금이 보장이 안 되고 일단 학교를 다니면서 고려하겠다는 통지를 받았고 브랜다이스에서는 학자금 생활비를 다 책임지는 ‘펠로우십’이라는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통지를 받았다.

 

유학을 가는 시점에서 이제 부모님에게 더 이상 신세 안 지고 독립하고 싶은 마음도 강하고 전액 장학금을 주는 대학이 나를 더 반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추천장을 써 주신 교수님들과 상의한 결과 버클리가 학교 프로그램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멀리 보아 고려해야 되고  학교를 다니다 보면 한학기 지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의견을 받았다. 마지막까지 고민을 하다가 버클리를 선택하게 되었다. 막상 선택하고 나니 빨리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 여름학기에 영어를 듣는 것을 선택하여 1982년 6월말에 나가게 되었다.

 

나의 대학 시절을 정리하자면 막연히 훌륭한 과학자가 되겠다고 서울대 이공계에 입학하여 2학년 때 물리학과를 전공으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박대통령의 시해, 광주사태 등을 겪으면서 6개월 이상의 휴교를 하는 가운데에서 인생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 보았다.

 

자진하여 원한 것은 아니나, 학도호국단 자연대 대표를 하면서 문교부 파견으로 일본과 필리핀을 다녀 오게 된 것은 너무나 좋은 경험이었다. 빨리 넓은 세계로 나가 더 많은 것을 경험해 보자는 결심을 하게 되어 미국에 유학을 서둘렀다. 그러한 과정에서 일반 물리학이 아닌 생물물리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비록 고민은 많았지만 대학교 시절 추억도 많았다. 친구들과 여행, 한라산, 덕유산, 설악산 등 등산을 다니고 대학교 일학년 때 강촌에 가서 밤새 노래 부르던 추억도 있었다.

 

이제 미국에 부푼 꿈을 안고 떠나는 유학 생활이 앞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혼자 떠나는 유학길에서 해프닝도 많이 일어 났다. 다음 편에 버클리에서 대학원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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