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

대학원시절(1부)

공석환 2009. 7. 12. 08:28

 

 

 

1982년 처음 버클리에 와서 9개월간 살았던 외국인 기숙사로 2005년에 찍은 사진이나 20년 이상 지나도 달라 진 것은 없다.  그 당시 내 방번호가 404호였다.  

 

버클리 대학에 생물물리학 박사과정으로 가기로 정하고 여름학기에 영어코스를 듣는 것으로 하여 미국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고 드디어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네  처음 미국 가는 길에 해프닝이 좀 있었다.  우선 그 당시 서울서 직항이 아니라 시애틀에서 갈아 타는 비행기였는데 혹시 미국서 선물할 가하여 김포공항에서 인삼정을 구입한 후 간이 백에 넣은 후 시애틀에서 화장실에 다녀올 때 잠간 큰 가방 옆에 나 두었는데 잠간 다녀온 사이에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인삼은 큰 문제가 아닌데 시애틀에서 샌프란시스코 간의 비행기 표가 인삼정이 있는 선물가방에 같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당황하여 항공사 카운터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 하였더니, 그 표를 다른 사람이 쓸 수 있어 무료로 재 발행은 안되고 다만 가장 싼 표로 다시 발권해 주겠다고 하여 처리하였다.  그러나 미국 도착하자 마자 그런 일을 겪었더니 좀 아찔하였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해서 친구의 친척 분이 마중을 나오셔서 같이 식사를 한 후 학교 가까이 모텔에 숙박했는데 주는 방 번호가 4호였다.  그리고 다음날 기숙사에 들어가서 방 번호를 받으니 남향으로 좋은 방을 준다고 한 것이 404호였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기분 나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미국 체제동안 잘 지내었고 나중에 학위를 받고 겨울에 시카고 대학을 차로 이사를  가다가 눈길에서 생명이 위험한  고비를 딱 한번 겪었으나   무사했다.  그 내용은 나중에 적어 본다.

 

 

버클리 대학교의 첫 인상은 참 좋았다.  학교 내부의 건물은 고풍스러운 모양으로 멋 있게 보였고 바로 학교 앞 거리도 활기차 보였다.  색색의 화려한 티 셔츠를 입은 히피 같은 사람들의 길거리 연주도 있었다.  여름학기에 영어를 들어 보니 내용도 쉽고 재미 없었다.  그래서 다음 학기를 대비해서 전공에 관한 책들을 미리 공부하는데 열중 하였다.

 

버클리에 처음 가서 한국말이 들리기에 반가와 했더니 그 쪽에서 하는 말이 “처음 오셨나 보아요” 였다.  당시 이미 한국 대학원생이 300여명 이민자를 포함하여 한국계 학부생이 1000명 정도 이였고 학교부근에 한국식당도 두 군데나 있었다.  그런데 막상 학기 시작을 남겨 놓고 보니 갑자기 속이 쓰리고 하여 밤에 응급실로 가서 약을 받아 먹은 적이 있었다.  슬슬 긴장이 되었던 것 같다.

 

모든 비용을 부모님에게 의존하기는 좀 무엇해서 첫 학기부터 물리학과에 가서 일반 물리학 강의 조교자리를 얻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나한테 배정되었던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아직 남을 영어로 가르칠 영어 실력이 안된 상태에서 좀 무리였던 것 같다. 그래서 외국인 조교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모임을 나갔더니  뉴질랜드에서 온 대학원생이 참석을 하였다. 자기 영어를 미국 학생들이 못 알아 듣겠다고 불평한다고 한다.  

 

조교를 하면서 채점을 하다 보니, 우수한 학생과 못 따라 가는 학생간의 격차가 매우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주립대학이라서 캘리포니아 주 내에서 고등학교 졸업한 학생은 비교적 입학이 쉬어서 들어온 학생중에 매우 우수하면서도 학비가 싸서 다니는 학생들하고 막연히 입학한 학생들하고 격차가 큰 것이다. 버클리에 입학한 학생중 당시 30%정도는 일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탈락한다고 들었다.

 

  미국에 와서 미국을 알기 위해 신문 방송은 하루에 30분 이상 보았다. 그러한 가운데 그 해 겨울에 비가 많이 내렸을 때, 샌프란시코 교외에 마린 카운티라고 하여 해변과 인접한 곳에 침수가 된 것을 방송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미국 같은 부국에서 더구나 부자 동네가 침수가 된다는 것을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다. 즉 그 때 강수량이 30년에 한번 내릴 큰 양이 었는데 그러한 큰 홍수에 일일히 대비하여 시설을 갖추는 것은 경제적으로 낭비라는 것이다.  30년에 한번 침수피해를 당할 경우  부자 동네 집들이 거의 다 보험이 들어 있어 해결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안 되었으나 생각해보니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것이었다.

 

 첫 학기 긴장하고 지내다가 무사히 성적을 잘 받고 나니 조금 긴장이 풀린 것 같다.  내가 있던 기숙사는 외국학생과 미국학생이 섞어서 쓰는 곳인데 한국학생들과 같이 어울려 다니다 보니 외롭지는 않지만 영어가 안 느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9개월만에 기숙사를 퇴사하여 미국사람 사는 집에 방 한칸을 얻어 자취를 하였다. 

 

 그런데 그 집 부엌을 같이 쓰는데 어찌나 주인 아주머니가 깐깐한지 식사 준비 끝나고 나면 부엌에 물 한 방울 없게 해 놓아야 되어서 고생을 하다가 방 세개 아파트를 학생들이 방 하나씩 나누어 쓰는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같이 아파트를 쓰는 미국학생이 아주 괴짜였다.

 

버클리에서 학부를 졸업한 후  하바드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고 다시 버클리에서 독문학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이였다.  하바드에서 마르크스 사관을 주제로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는 받았는데 지도교수가 추천장을  써주지 아니하여 정식 교수를 못하고 여기저기 강사만 하는 고생을 하였다고 그런다.  다시 버클리 독문학 박사과정에 들어 와서 마치면 독문학 교수를 하려는 친구였다. 맥주 마시며 하는 이야기가 미국 사회가 보수적이라서 겉으로 차별이 없어 보여도 좌익사상을 보이는 사람은 직업을 얻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러한 사상문제는 깨끗이 씻고 다시 시작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바드에서 조정팀에서 노를 저었다는데 체격도 건장하였다. 그런데  나이 29에 이혼 경력 2번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춘기인 나이 12살에 부모가 이혼을 한 것이 정신적인 충격이 컸었던 것 같다.  첫 결혼은 고등학교 졸업하자 마자 소위 “퍼피 러브” 강아지 사랑이라는 뜻으로 철 없이 결혼했다가 금방 헤어졌다고 한다.

 

두번째 결혼은 유태인 여자와 하바드 대학원 시절에 결혼하였다가 몇 년 살다가 성격 차이로 헤어졌다고 한다.  부자집 딸인데도 이혼할 때 책을 제외하고는 자기 것을 다 가지고 갔다고 하면서 유태인들 독하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야기를 해 보니 사춘기 예민한 때에 자기 부모가 이혼한 것이 정신적으로 충격이 있었던 것 같고 그러한 영향이 향후 결혼 생활에 악영향을 준 것 같다.

 

 

 

 

내가 1983년부터 1986년 사이에 아래층 원룸을 빌려 혼자 자취를 했던 집. 주인은 임상 심리학자로 정신 상담하는 사람인데 아직 그대로 사는 듯, 이 허름한 집이 샌프란시스코, 버클리가 다 내려다 보이는 전망으로 시가가 5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1년반 정도 지나고 학교에서 연구 조교가 되어 월 1200불 지금 가치로는 거의 월 300만원 정도를 받게 되어 이제 자립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서양사람들하고 살다 보니 배우는 것은 있어도 결국은 불편한 것이 있어 학교 뒷 산에 있는 주택가로 샌프란시스코가 내려 보이는 집 주차장을 개조한 한국 평수로 6평 정도의 원룸으로  이사하여 3년간  살게 되었다.  아침이면 집 앞에 뒷산에 있는 사슴이 내려오고 낮에 혹시라도 안개가 없이 개인 날이면 샌프란시스코 시내와 금문교가 다 내려다 보이는 절경의 집이 었으니 비록 주차장을 개조한 아래 층 원룸에 살았어도 만족하였다. 

 

 

 

 

 

 자

 

자취했던 곳에서 내려다 본 버클리 대학의 전경. 중간의 높은 탑이 새더 타워라는 곳으로 높이가 90m 정도 된다   그 주위 주로 빨간 지붕의 건물이 다 대학 건물이고 멀리 샌프란시스코 만의 일부인 바다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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