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

대학원시절(3부)

공석환 2009. 7. 19. 17:15

버클리에서 대학원 과정에 있으면서 과학 연구 이외에 좋은 경험을 많이 하였다. 우선 버클리에서 1년을 마치고 1983년 여름에 미국 동부를 여행을 하였다.  .

 

 친구들 중에 동부에 유학 온 사람들이 많아 친구들 신세지고 다녔다.  먼저 사촌여동생이 남편하고 유학을 와 있던 미시간 주립대학을 가서 구경을 하고  디트로이트에서 기차를 타고 밤차로 나이아가라를 가게 되었다. 새벽 6시 정도에 현지에 도착해서 미리 예약해 놓은  렌터카를 이용 해서 캐나다 쪽을 넘어가서 나이아가라를 구경하고 폭포 밑으로 들어 가는 배도 타 보았다. 

 

진짜 인생에서 처음 보는 절경이었다. 배를 타고 폭포 밑으로 들어 가 보니 한 여름의 더위가 다 날아 갔다. 당시 니콘 Fm2라는 수동식 사진기로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나중에 현상을 해 보니 멋 있는 사진들이 많았다. 캐나다 지역으로 넘어가서 우연히 들린 곳에서 뷰페로 점심을 하면서 맥주 맛이 왜 그렇게 시원한지 혼자 다니면서 분위기에 취해 다녔다.

 

그리고 캐나다 지역에서 그 때 현대차가 수출이 시작되어 눈에 띄였다. .어찌나 반가운지 자기 차가 굴러 다니는 느낌이었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었다.

 

나이아가라 다음으로 뉴욕을 들려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와 있던 고등학교 친구 아파트에 신세를 졌다. 아파트는 작지만 내가 버클리에서 쓰는 원룸 월세의 3배인데 그나마도 학교 아파트라서 싸게 얻은 것이라고 들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 보았다. 그러한 대단한 건물을 1930년대에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아니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술의 진보가 건축분야에서는 별로 아닌 것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자유의 여신상은 멀리서 보니 생각보다 별로 였다. 여신상 횃불에 올라 갈수는 있다고 하는데 너무 오래 기다려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때 뉴욕 맨하탄 여기 저기에 쓰레기 더미가 안 치위지고 남아 있었다.  세금이 모자라서 청소를 제 때 못해서 라고 이야기를 들었다. 지하철을 들어 가서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페인트칠이 벗기어지고 낙서 투성이인 차량을 보면서 이거 완전히 빈민가에 온 느낌이었다.  세계적인 도시라는 뉴욕의 첫 인상은 한마디로 실망을 주었다.

 

그 다음으로 뉴욕 가까이 예일대학에 들렸다.  마침 서울대 물리학과 동창중에 동부에 유학 온 친구들 6명 정도가 내가 오는 날자에 마쳐서  같이 모여서 서로 오랜만에 반가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일대학에 가 보니 조용한 교외에 위치한 유서 깊은 대학이라서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모였던 친구 하나를 따라 브라운 대학을 갔다가 뉴포트라는 곳을 가 보게 되었다. 대서양 해안에 미국의 부자들이 별장을 짓고 지내던 동네인데 “위대한 게츠비”라는  영화에서 파티가 벌어지는 멋있는 해안 별장이 실제 있는 곳이다.  지금 일부 큰 별장은 보호건물로 되어 있고 입장료를 받고 보여주는데 실제로 내부를 들어 가보니 금박에 화려함이 궁전에 못지 아니 하였다.  미국의 큰 부자들의 씀씀이를 알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보스턴에 들려서 하바드와 MIT대학을 구경하였는데 MIT대학은 공장이라는 별명이 있듯이 정말 학교 건물은 별 볼일 없엇고 하바드도 오래 되어서 건물은 멋 있지만 개인적인 느낌은 예일대학이 더 조용한 곳에 멋있는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느꼈다.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프린스턴 대학을 가 보았는데 내가 가 본 미국 캠퍼스 중에 최고였다. 부근의 동네도 고급집 들이 즐비하고 심지어 기혼자 학생을 위한 아파트도 넓은 들이 훤히 보이는 곳에 위치하여 있었다. 아인스타인이 연구하였던 고등과학기술연구원이 프린스턴대 교정안에 있는데 모든 분위기가 고급스러웠다.

 

 동부 여행의 마지막으로 위싱턴을 가게 되었다.  친구가 매릴랜드대에 있어 3일간 신세를 지면서 국립미술관, 스미소니안 박물관을 구경하였다.  매릴랜드대에서 워싱턴 시내를 나가는데 지하철을 타고 나갔는데 뉴욕의 지하철과는 딴판으로 깨끗하였다. 역시 수도라서 관리를 해서 그럴 것이다.  국립미술관에 가서 중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서 보던 그림을 실제 앞에 두고 보니 신기하였다.

 

그리고 스미소니안 박물관에 갔더니 세상에 진기한 것은 다 모아 놓은 듯 한데, 가장 신기한 것은 커다란 공룡 화석하고, 보석이라고 생각이 안될 정도로 큰 보석들을 진열해 놓은 것이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보석이 큰 접시 크기로 있으니 그 것을 보고도 눈꼽 만한 돌을 반지에 박고 가지고 다니는 것을 좋다고 하나 하고 속으로 웃었다.

 

2008년 처와 3자녀를 데리고 미국 동부를 다시 다녀오게 된다. 그에 대한 경험은 이 블로그 미국폴더 동부 여행에 있다.  25년만에 복습을 하면서 전에 감명 깊었던 곳을 가족들에게 다시 보여주게 된다.

 

버클리에 미국에 이민을 와서 대학과정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아 기숙사에 있을 때 어울려서 대화를 한 적이 많다.  그러는 과정에서 미국에 태어나거나 초등학교 이전에 미국에 온 사람은 거의 미국에 동화되어 한국에 대해서는 부모의 나라로만 알게 되고 중학교 때 미국에 온 사람이 가장 영어와 국어 양쪽을 잘 하면서 어중간하고, 고등학교 이후에 미국에 온 사람은 아무리 미국에 오래 살아도 영어가 미국사람처럼 되지도 아니하고 문화적으로도 동화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학교 이후에 이민오거나 유학을 온 학생들은 자기 정체성에 고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미국에 동화하여 살 것인가 아니면 미국은 잠시 있는 곳이고 한국에 다시 돌아가든지 아니면 미국에 살더라도 한국 사람으로서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가 하는 고민이다.  기숙사에 있을 때 어렸을 때 이민을 온 한국학생이 요새 ‘종이’쓰냐고 바쁘다는 말을 하여 무슨 이야기 인가 했더니 학교 숙제로 논문(페이퍼)을 쓴다는 것을 ‘페이퍼’에 대해 논문이라는  표현을 못 하고 ‘종이’로 한 것이었다.

 

버클리에 있을 때 교수회관에 들렸다가 바둑 클럽이 매주 목요일 저녁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보통 30-40 명이 모이는 데 대부분의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동양사람이 아닌 서양 사람으로 주로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하는 사람들 이었다.  그 당시 내가 3급 정도의 급수 였는데 나보다 더 잘 두는 서양사람이 2명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으로서 회사에 다니다가 회사에서 경비를 대 주어 공대 기계과에 석사과정으로 온 학생하고 기숙사에서 만난 후 서로 바둑을 같이 두게 되어  친하게 지냈다.  비록 회사 다니다가 와서 나이는 나 보다 위지만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이 개인적으로 만나면 정서적으로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 친구가 석사 끝내고 일본 회사에 다시 복직한 후 방학에 한국 가는 길에 들린 적이 있다.  그런데 도쿄에서 회사 아파트에 사는데 엄청나게 좁아서 놀랐다. 그 나마도 회사에서 대주는 것이 아니면 도쿄는 너무 비싸서 월급쟁이 봉급으로 매입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일본사람은 나라는 부자라도 개개 월급쟁이로 일하는 보통 사람들은 좀 불쌍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버클리에서 다른 즐거웠던 기억이 많다.  같은 건물에 일하시던 한국분 부부가 버클리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같이 일하시는데 레이크 타호라고 별장을 가지고 계셔서 겨울 주말에 초대를 하여 주셨다.

 

 레이크 타호는 예전 대부 영화에서 나온적이 있는 곳으로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주 사이에 해발 1000m가 넘는 곳에 제주도 반만한 크기의 큰 호수이다.  타호가 인디언 말로 대호 즉 큰 호수라고 한다.  아메리카 인디언과 우리말이 같은 알타이어 계통으로 유사점이 있다고 그러는데 신기할 정도로 비슷한 표현이 있는 것이다.  그 곳의 스키장에 눈과 호수가 어울린 경치가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처음 스키도 타 보게 되었다.  그 후 다른 유학생들하고도 겨울에 자연설을 즐기며 스키를 타러 가곤 했다.  

 

그리고 버클리에서 음악도 좋은 경험을 많이 하였다. 버클리 대학내에 유명연주자들이 학교 강당이나 심지어는 음대 소강당에서 연주를 하여 잊지 못할 경험을 하였다.   “밀스타인”이라는 왕년의 바이올린 거장이 당시 나이가 80정도 되었는데 연주를 학교 대강당에 와서 하였다.  그런데 바하의 바이올린 무반주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힘이 딸려 하더니,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에 와서는 왜 그가 왕년에 로맨틱한 명장이었는지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 나이에 바이올린의 감미로운 선율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또 하나 음대 소강당으로 600석 정도 되는 곳에서 보자르 삼중주단이 와서 드보르작의 “둠키”를 연주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사실 그 곡을 좋아해서 판으로도 집에서 들었는데 그러한 실내악 연주를 소강당에서 직접 들으니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들으면서 박자가 자기 무릅에 와 닿는 느낌이었다.

 

버클리에 인접한 오클랜드시의 농구장에서 유명한 테너인 파바로티와 유명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인 서덜랜드가 같이 듀엣을 한다고 하여 갔던 경험이 있다. 농구장에서 연주회를 하여 음향은 실황 느낌이 안 들지만 파바로티가 체육관에서 사방을 360도  돌으면서 모든 청중들에게 손짓을 하면서 노래를 하는 것을 듣고 노래 실력은 물론 쇼맨십도 일류라는 생각을 하였다.

 

정리하면 버클리에서 체류한 1982년부터 1989년 사이에 과학 연구 이외에 미국 사회를 직접적으로 아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좋은 추억도 많았다. 미국에서 5년간 독신으로 체류한 후 한국에 와서 결혼을 하여 1년반은 처와 같이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학위를 마치고 다음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한다. 그 부분은 다음 글에서 쓴다.



'꿈과 현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카고 대학 연구원시절(2부)  (0) 2009.08.02
시카고대학 연구원시절(1부)  (0) 2009.07.25
대학원시절(2부) 연구과정 이야기  (0) 2009.07.16
대학원시절(1부)  (0) 2009.07.12
대학시절(3부)  (0) 2009.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