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에 시카고 대학을 방문하여 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 위에 보이는 아들이 1990년에 시카고 대학에 있을 때 태어났다. 큰 딸은 시카고 대학에 있을 때 임신을 하였는데 1991년 한국에 돌아 와서 출생하였다.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과정에 6년반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을 있은 이유는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유학을 나왔으므로 서두를 것 없이 좋은 연구 결과를 내고 싶었다. 즉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남이 알아 주는 높은 학문적 성과를 얻고 싶었다. 즉 내가 연구하던 막 단백질의 구조를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구는 생각보다 잘 안 진행되고 내 지도교수님은 그 동안 연구한 결과로 박사학위는 받고 다른 곳으로 옮겨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가는 것을 권고하여 주셨다.
그 구체적인 방향으로 독일 뮌헨에 있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 가는 것과 시카고 대학으로 가는 것을 추천하여 주셨다. 독일에 가서 유럽생활을 경험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봉급도 유럽에 가서 연구원 생활을 하면 당시 연 3만불이 넘고 시카고 대학은 연 2만불이 약간 안 되었다. 그러나 시카고 대학에서 할 연구 주제가 더 장래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시카고 대학 생화학과에 연구원으로 가게 되었다.
논문을 정리하다가 1989년 1월에 출발하게 되었다. 짐을 부치고 비행기로 갈 수도 있었지만 내가 쓰던 토요타 코롤라 자동차가 오래 써도 고장이 별로 없어 더 타겠다고 직접 몰고 해치백이라서 비교적 트렁크가 커서 짐을 잔뜩 실고 떠나게 되었다. 결혼을 1987년 여름에 한국에 나가서 하였는데 아직 애는 없어 처와 교대로 운전을 하여 시카고를 향하여 대륙횡단을 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네바다 주를 거쳐 유타주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길에 눈이 너무 내려 모텔에 쉬었다가 아침에 일어나 출발하여 고속도로로 나갔더니 길에 눈을 치우지를 못하고 깊게 쌓여 있었다. 겁이 나서 처음에 살살 기어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가다가 그 동네 차량들이 추월하는 것을 보고 조금 더 속도를 내도 되나 보다 하고 속도를 80KM정도로 조금 올렸었다.
그러고 나서 차가 미끄러 지는데 제어를 할 수가 없었다. 아찔하게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중앙분리대를 박고 차가 섰는데 다행히 충격이 크지 않아 내 처가 무릎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것 빼고는 큰 부상이 없었다. 그런데 차의 시동이 껴져서 다시 걸려고 하였는데 걸리지 아니하여 나가 보았더니 차의 앞 부분이 아코디언처럼 줄어들어 푹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제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차 앞부분이 충격을 흡수해 주었기 때문에 승차했던 사람이 무사했던 것이다. 만약 미끄러질 때 차의 측면으로 중앙분리대를 박았으면 그 차에 에어백도 아직 없던 때였는데 큰 부상을 입거나 사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미국에 와서 처음 투숙한 모텔이 4호였고, 기숙사 방번호도 404호였는데 4자로 시작하는 곳에서 이제 그나마 액땜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견인차를 불러 짐을 정리하여 일부는 버리고 일부는 수습하여 그 곳에서 시카고까지 그레이 하운드 버스를 옮겨 타고 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견인차를 불러서 차를 버리는 곳에 가 보았더니 우리차처럼 겨울에 사고 나서 버려지는 차가 수십대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겨울에 사고가 많은 지역이었다. 안 다친 것 만 해도 천우신조라고 생각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시카고 대학에 도착하여 보니 학교 주위가 흑인 동네에 둘러 싸여 심각해 보였다. 버클리도 옆 도시인 오클랜드로 가면 흑인 사는 동네가 좀 험해 보이기는 하지만 시카고 대학은 거리 한 블록만 지나면 건물들이 불에 타 있고 전쟁을 맞은 듯 폐허 수준이었다. 들리는 이야기로 사람들이 일부로 보험을 타려고 건물에 불을 지른 후 방치하여 그런 것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연구를 하기 위해 온 것이니 동네 분위기와 관계없이 정착하게 되었다. 학교 직원 아파트가 내 연구실에서 200m 밖애 떨어지지 아니하여서 점심도 집에 와서 먹고 가고는 했다. 직원으로 있다 보니 학교와 직원과의 단체 교섭결과로 봉급은 작아도 의료보험은 가장 좋은 조건으로 병원에 가서 아무리 큰 치료를 받아도 다 무료인 조건이었다.
큰 아들이 시카고 병원에서 태어날 때 처가 임신당뇨라는 진단을 받아 출산촉진제를 받고 출산 예정일보다 10일 정도 먼저 낳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처가 일주동안 병원에 임신하였는데 나중에 고지서를 보니 일만불이 청구되어 있었다. 물론 의료보험 처리가 되어 내가 개인적으로 돈을 내지는 않았고 그 당시 내 연봉이 연 18000불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큰 돈이었다.
그리고 첫 애를 날 때 미국에서는 남편이 옆에 있는 것이 산모에 정신적 안정을 준다고 하여 출산실에 들어 가서 간호원이 힘을 주라고 “푸시, 푸시”하고 이야기 할 때 처의 손을 꼭 잡고 출산과정을 직접 지켜 본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시카고는 보수적인 도시이고 버클리 쪽 분위기와는 많이 차이가 있었다. 나는 연구원으로 직원 신분이였지만 당시 시카고 대학에 유학온 한국 학생들하고 많이 어울리고 친하던 한국 학생의 결혼식 사회도 본 적이 있다. 시카고 대학에는 경제학과가 유명하였고 당시 최태원 SK 회장도 있었다고는 들었는데 직접 만나지는 못하였다. . 시카고 한인지역도 가끔 가서 한국 장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날씨는 겨울은 영하 20도 밑으로 내려가고 여름은 후덥지근 하였다.
그런데 시카고 부근은 평지라서 버클리에서 겨울에 즐기던 스키를 탈 곳이 없었다. 위스콘신에 스키장이 있다고 하여 가 보았다가 해발 고도차가 200여 미터 안팍으로 우리나라 양지스키장 수준인 것을 보고는 실망하여 그냥 온 적이 있다.
시카고 대학에 있을 때 기억나는 일로 같이 연구하던 교수의 결혼식에 참석해 본 것이다. 교수가 당시 30대 후반의 노총각이었는데 같은 연구실에 있던 대학원생하고 친해져서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미국 사람들의 결혼식은 아주 가까운 친척 및 친구 50명 이내 만을 초대하여 오붓하게 결혼식을 치루고 피로연을 같이 하는 것이 많다. 나도 같이 연구를 하다 보니 초대받아 결혼식과 피로연에 참여 했었다.
축의금은 없고 대신 간단한 선물을 사 가는데, 가 보니 피로연 비용이 선물 값보다 더 들어 보였다. 같이 일하던 연구원중에 스위스에서 의사자격을 따고 기초 연구를 더 해 보겠다고 아직 독신으로 있으면서 와 있던 사람이 있었다. 커피를 에스프레소로 약 수준으로 진하게 먹는 것, 곰팡이 슬었으나 독특한 향기를 가진 치즈 종류를 가르쳐 준 것, 와인의 종류 및 먹는 법을 간단하게 전수 받았다.
의사 자격을 받으면 우리나라 같으면 개업하든지 병원에 취업해서 편히 살려고 생각할 텐데 아직 독신으로 다른 나라까지 와서 열심히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모습에 처음 접한 스위스 사람으로서 인상이 아주 좋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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