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

시카고 대학 연구원시절(2부)

공석환 2009. 8. 2. 12:13

 

시카도 대학 연구원 시절인 1990년에 유타주에 있는 '아치스 국립공원'에 가서 신기한 풍경에 감탄을 하였다. 당시 큰아들이 생후 9개월이었다. 위에 올린 사진은 15년후인 2005년에 가족들이 다시 방문하여 찍은 사진이다. 

 

 

1990년 11월말 미국의 추수감사절에 열흘 휴가를 내어 시카고에서 아이오와,  네브래스카, 콜로라도의 록키 산맥을 넘어, 미국 유타주에 있는 국립공원을 거쳐 라스베가스를 갔다가 그랜드 캐년, 애리조나, 텍사를 거쳐 열흘간 약 6000KM를 차로 운전하여 여행을 하였다.

 

네브래스카와 아이오와는 그야 말로 가도 가도 지평선 밖에 보이지 아니하는 지루한 길이었다. 그러나 콜로라도에 가서  중턱까지 차로 올라 가서 록키 산맥을 보니 감탄이 나왔다. 역시 자연의 규모가 우리하고는 상대가 안 되었다. 

 

그리고 유타주에 있는 국립공원으로서 “아치파크 국립공원”이라는 곳에 가면 자연적으로 생긴 굴다리 모양과 버섯 모양의 기암괴석이 다 수 있는데 전에 인디애나 존스 영화의 배경으로 본 적이 있지만 실제 와 보니 지구상의 이런 곳이 있나 하고 감탄 스러웠다.

 

그랜드 캐년도 그 규모에 놀라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유타주에 있는 국립공원이 더 신기하였다. 아이들이 큰 2005년에 다시 서부의 국립공원에 다시 들리게 된다. 

 

 라스베가스에서는 가족을 카지노에 데리고 들어 갔다가 당시 9개월된 아들이 호기심에 슬롯 머신에 손을 대었더니 경비원이 와서 법률상 미성년자가 슬롯 머신을 만지면 안 된다고 하여  처가 급히 아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어야 했다. 

 

 아리조나에서는 운석이 떨어진 곳에 들렸는데 운석은 보이지 아니하고 충돌로 인한 지형만 크게 파였는데 그 것만 보아도 운석 충돌 시 충격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날은 시간에 쫒겨서 텍사스에서 출발하여 시카고까지 1650km를 중간에 편의점에서 잠간 식사하기 위해 쉰 것을 제외하고는 논스탑으로 달려 아침 10시에 출발하여 새벽 2시 까지 계속 운전을 한 적이 있다.

 

시카고에 거의 다 와서 운전하는 중에 핸들에 머리를 박고 꼬박 꼬박 졸았다고 한다. 그래서 옆에서 처가 놀라서 깨우다가 안 되어 처가 대신 교대하여 운전을 하였다. 1650km라 거리는 당일 서울에서 부산에 내려 갔다가 다시 올라 온 후 다시 부산에 내려 갔다가 다시 돌아 온 거리에 해당한다. 즉 당일에 서울 부산을 두번 왕복한 것이다.  그 때 아직 30대 초반으로 혈기 왕성해서 그렇게 무리하게 운전을 하였지 그 이후로는 그렇게 해 본적이 없다.  

 

시카고 대학에서 연구 주제도 대학원 때와 유사하게 대장균의 막 단백질 중 구멍이 뚤려 있는 “Porin”이라는 단백질의 구조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단백질을 추출하는 일을 하는 것이 더 큰 일이었다. 

 

대장균을 200L만큼 배양하여 수확을 한 후 처리를 하는데 시카고 대학에 그 만큼 균을 기를 시설이 당시 없어 위스콘신주 메디신에 있는 대학원 때 지도교수님이 학부를 다니신 위스콘신 대학에 균을 기르러 다녀 온 적이 있다.  시카고 대학과는 달리 캠퍼스도 넓고 주위도 평화스러워 가서 부럽게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단백질을 분리하여 결정은 얻었는데 구조를 구명하는 데에는 실패를 하였다. 그 원인은 그 단백질에 ‘시스테인’이라는 아미노산이 있어 거기에 중금속을 붙인 후 중금속을 붙이지 아니한 원래의 결정과 비교를 하여 구조를 찾게 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시스테인’이라는 아미노산이 단백진 중간에 숨어 있는지 중금속이 붙지를 아니하였다.

 

그런데 내가 그 일을 하기 전에 그 단백질을 대량 분리하여 실험을 해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중금속이 붙는지 않 붙는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럽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도  시카고 대학의 연구 프로젝트가 더 좋다고 생각해서 여기 까지  와서 연구를 하였는데 생각한 대로 진행이 안 되다 보니 좌절감이 컸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국의 연방 예산 적자가 너무 누적되다 보니 ‘그램러드만’ 법이라는 의원입법으로 모든 예산을 일률적으로 10%씩 삭감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과학분야에서 연구비도 같이 10% 삭감되는 분위기라 보니 대학에서 연구하는 사람들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었다.

 

당시 미국의 경제상황이 최근 미국 경제상황과 비슷하였다. 이제 우리나라에 귀국하여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1990년 12월에 한국을 방문하여 대학과 연구소를 들려 귀국 후 자리를 알아 보았더니 만족스럽지 아니하였다. 자존심으로는 좀 명문대에 교수직을 원하였는데 빈 자리가 별로 없었고, 연구소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불만이 많았다. 

 

 박정희 대통령때 해외 우수 과학기술인력을 초빙한다고 아파트도 주고 연구비도 후하게 주면서 대우를 잘 해 주다가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연구소에 지원이 신통치 아니하다고 불만이 많았다. 

 

명문대가 아닌 지방의 작은 대학에 교수로 가게 되면 연구환경이 좋지 아니하여 연구는 못하고 그냥 학생들 강의나 하다가 놀고 지내지 아니할 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고심하다가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미국에는 이학박사 출신이 법대에 진학한 후 변호사가 되어 자기 전공을 살려 환경이나 특허 분야에서 전문변호사 활동을 하는 것을 참고한 것이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도 한국에 가서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법조인이 되면 언젠가는 미국처럼 전문변호사 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는 그 동안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도 많아서 사법고시를 준비하여도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함께 하였다. 과학자의 꿈을 접고 새로운 도전의 길을 가려고 결정한 것이다.

 

1991년 4월 모든 가족을 동반하여 귀국한 후   그러한 결정을 어르신들에게 동의받는 것이 큰 일이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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