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막상 사법고시 2차 합격 발표일이 다가 오자 가슴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만약 안되면 그 해에 일차시험을 합격하엿으니 내가 한달전에 상법을 강의를 한 학생들과 경쟁자가 되어 다음해에 다시 도전을 해야 될 형편이었다.
그런데 발표일 전날 우리집에 5-6분의 기자들이 동시에 들이 닥쳤다. 언론에서 당시 사법시험을 관장하는 총무부에 합격 발표전에 이색 합격자가 없는지 알아 보는데, 내가 그 범주에 들어 간 것이다. 기자들이 알아 보았더니 이공계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으로서 내가 최초로 우리나라 사법고시를 합격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1996년부터는 사법고시 합격자수를 늘리게 되었다. 그래서 1995년에 합격하여 마지막으로 300명을 뽑는 좁은 문을 통과한 세대가 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방송기자들도 우리집을 방문하였다. 아들이 당시 6살인데 피아노를 잘 친다고 보여 주었다. 기자들이 어린애가 제 법인데 하고 나중에 방송에 내 이야기가 소개되면서 아들이 피아노 치는 모습도 잠간 배경으로 나왔다.
큰 아들이 6살에 하는 피아노 연주가 방송에 나왔으니 음악쪽으로 나갈만도 하였다. 피아노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아들이 손가락이 유연하고 소질이 있다고 음악 전공을 하는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음악은 취미로 하면서 지금 일리노이(어바나 샴페인 소재)대학 공대에서 소재공학을 공부하고 있다.
나중에 주간지 및 여성잡지에서도 인터뷰하러 와서 사시 준비하는 동안 내 처가 고생한 이야기 등을 취재해 가서 그 여성잡지를 보고 내 처의 친구들이 나중에 알고 연락이 온 적이 있었다.
방송에서도 섭외가 와서 당시 라디오 인터뷰 형식으로 김한길씨가 진행하던 김한길쇼라는 곳에 단독 인터뷰형식으로 라디오 출연도 하였다. 당시 방송녹화전 30분전에 가서 미리 준비를 하여야 하는데 길이 막혀 늦게 가서 거의 생방송과 다름없이 논스톱으로 녹화를 하게 되었다.
텔레비전 방송에도 두 번 출연해었엇다. 이문세쇼는 당시 토요일 저녁에 녹화 방송하는데 평소에도 이문세씨의 노래를 좋아 했던 입장이라 출연제의를 받고 기꺼이 응하였다.
실제 녹화장에 가 보았더니 강수지씨, 씨름선수 박광덕씨와 같이 출연을 하게 되었다. 강수지씨는 아담하면서도 이뻤고 박광덕씨는 옆에 앉아 있었더니 위압이 될 정도로 우람하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고 내 처는 가서 이문세씨와 강수지씨의 사인을 두분들의 팬이라고 받아 왔다.
그런데 이문세 쇼 출연 후 지하철을 탔더니 알아 보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한귀퉁이에서 친구에게 나를 가르치며 속닥속닥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방송을 출연하면 소위 '공인'으로 사방에 보는 눈이 많아 조심해야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은 국회의원인 한선교씨가 당시 진행하던 아침 생방송 프로그램에도 우리 가족들만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장모님이 사위 시험준비할 때 어려웠던 일들을 다 이야기하셨는데 생방송이라 여과없이 즉석으로 나가니 좀 민망은 하였다.
아침 프로그램의 출연료로 사이판 왕복 2인 팩키지 표를 받게 되었다. 아이들 표값은 보테어 그 다음해 2월에 아이 셋을 데리고 간 사이판 여행의 기쁨은 날 달랐다. 아빠 사법고시 공부한다고 4년동안 잘 해 주지도 못한 처와 애들에게 사이판에서의 열대 여행은 꿈 같았다.
그런데 자꾸 신문 방송 기자들을 만나다 보니 좀 개인적으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사법고시를 시작한 것이 이공계박사학위를 살려 전문성을 가진 변호사가 되자는 것인데 자꾸 언론에만 접촉하였더니, 꼭 연예인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도 방송 출연 제의가 더 있었으나 고사를 하고 우리나라 제일 큰 K로펌에 연락을 하여 대표분을 직접 만나서 일을 좀 배우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래서 사법연수원 3월에 입소하기 전 4달동안 그 사무실에서 특허소송들에 관한 서류도 보고 미국에서 발행된 특허 관련 책도 공부하게 되어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서류를 보다 보니 특허소송중에 버클리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의 이름이 나오는 경우가 있어 그 건에 대해서는 관여하는 것을 사양한 적이 있었다.
사법연수원에 입학하여 새로운 길이 시작되었다. 법조인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법원 판결문, 검찰 공소문 등의 양식을 쓰는 방법도 공부하고 실무수습도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만 아쉬었던 것은 당시 사법연수원에 서울대 출신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에서 나이가 두번째로 고참이라 자주 참석하여 술자리가 많다 보니 공부에 지장이 많았다.
사법연수원 연수 때 기억나는 일로 설악산에 수학여행을 갔는데 간 첫날밤에 연수생들 일부하고 포커를 쳐서 내가 당시 25만원 정도를 땄던 것 같다. 그 다음 날 산에 오를 때 중턱에서 같은 반에 있는 있는 연수생들에게 내가 포커에서 딴 돈을 푼다면서 파전과 막걸리를 산 기억이 난다.
그랬더니 산행을 한 날 저녁에 연수생들이 다시 도전한다고 나서게 되었다. 그날 또 돈을 땄다가는 서울가서 리턴매치를 하자고 할 염려가 되었다. 그냥 본전으로 방어를 한 기억이 난다.
실무수습은 검찰실무가 인상깊었다. 경제사범을 다루는 부서에 있었는데 기업인의 고소사건을 조사를 하면서 전과기록을 보았더니 근로기준법, 환경법, 조세, 기타 개인적인 것 까지 15건이 넘는 전과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기업을 하자고 그러면 전과가 많아 지는 구나 하는 것을 현장에서 실제로 보게 되었다.
변사자들의 사망원인을 알기 위한 부검이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두 구의 시체의 부검을 보았는데 한 시체는 40대 중반의 남자로 전날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어 배에 칼이 찔려서 죽은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었다.
부검을 하는 목적은 칼로 인한 자상이 사망의 원인인지 아니면 그전에 독극물을 먹은 것이 있는지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 전날 사망했기 때문에 시체도 깨끗하고 꼭 아직도 자는 사람처럼 보였다.
먼저 배를 갈라 주요 내장을 꺼내어 관찰한 후 독극물 검사를 위해 일부 시료를 검출하는데, 사람 신체에서 간이 그렇게 큰 지 예상을 못해 놀랐다. 나중에 머리를 톱으로 짜른 후 뇌를 꺼내 보여 주는데 과학을 한 사람이지만 인체 해부는 처음 보아서 참 흥미 진진하게 보았다.
다음 시체는 20대 여성인데 죽은 후 겨울 땅속에서 2-3달 정도 묻여 있었던 시체로 당연히 피부도 탈색이 되고 아무리 시체라도 여자 나체를 정면으로 보는 것이 좀 검연쩍었다.
아마 강간 후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여 그에 대한 증거를 모으고 있었는데 강간 후 그 젊은 여자를 살해까지 했어야 되나 마음이 안 좋았다.
다른 연수생들 중에는 부검을 보고 토하거나 그날 밤 잠을 못 이루는 등 힘든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살인 현장을 보면 나는 개인적으로는 사형폐지론에 찬성할 수 없다.
인과응보가 아니라도 의도적으로 남을 살해한 자는 사형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범죄를 사전에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고 본다. 정치범에 대한 사형을 페지해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일반 흉악범, 강도, 강간 살인범 등에 대한 사형은 존치 되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어떠한 길을 갈 것인가 고민을 하게 된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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