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에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진로를 정할 때 고민을 하게 되었다. 당시 특허법원이라는 전문법원이 생기면서 그 쪽으로 가는 가능성도 고려하였는데 문제는 사법연수원 때 성적이 별로 좋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서울대 모임 등 후배들과의 모임이 많아 시간을 빼았기다 보니, 시험에서 후배들보다 뒤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원래 뜻한 바가 있어 이공계 전문 지식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해 본 결과 중앙국제특허법무법인에 가서 일하게 되었다. 이 사무실은 이병호 변호사님이 우리나라 판사 1호로 미국에 유학을 다녀 오신 후 변호사로 개업하신 후 특허 분야에서는 선도적인 역할을 하셧던 사무실이다.
개인적으로 큰 아버님과 이병호 변호사님이 서울대 정치학과 동기 동창으로 친하신 사이셨다. 중앙법무법인에서 많은 경험을 하였다. 모터롤라에서 특허책임자를 하셨던 이상기변호사 님의 지도와 미국 변호사자격증과 약사면허 그리고 미국특허청에 근무한 경력도 있는 죠지 브라이텐스타인(George Breitenstein)씨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당시 미국 GE, 애보트(Abbott), 일본의 소니, NEC, 마츠시다, 유럽의 획스트, 노바티스 같은 다국적 회사를 대리하여 중요한 특허소송을 맡았다. 그리고 템플펀 등 금융회사의 법률자문 등 기업 인수 합병 건도 여러건 관여하였다. 법원에 간 것 보다 중앙에서 더 국제적인 회사를 직접 대리하면서 좋은 경험을 많이 쌓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브라이텐스타인씨에게는 개인적으로 감사드릴 일이 많다.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개인적으로 향후를 대비하여 미국의 특허법책을 원문으로 공부하고 미국 용어로 법문을 쓰는 법을 공부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 실무를 해 보니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한국법에 맞게 법률의견이나 서류를 정리하여 내가 영어로 초안을 쓰면 브라이텐스타인씨가 문법이나 글 스타일을 다 고쳐주고는 했다. 물론 고치는 과정에서 내용에 오해가 갈 수 있으면 내가 고치고 다시 검토를 받았다. 그렇게 같이 일을 하는 동안 법에 관한 고급 영작문을 할 실력을 개인교수나 다름없이 도움을 받은 것이다.
중앙에 있을 때, 유럽상공회의소에서 발간하는 계간지에 “특허법원의 현황”, “한국에서의 특허침해소송” 등에 대해 2편 영어로 법률 의견관련한 내용을 기고한 바 있다. 내용은 내가 다 작성하였으나 그 글에 대한 영어 문법이나 스타일을 브라이텐스타인씨에게 교정을 받았다.
나중에 브라이텐스타인씨에게 저자 이름으로 공동으로 넣는 것이 어떤가 하고 물어 보았더니 자기는 영어만 고쳐 주었지 내용은 내가 다 만든 것이니 자기가 공동 저자로 들어가는 것이 맞지 아니하다고 사양을 하였다. 내가 그 전에 영어를 20년 넘게 공부를 하였어도 영작문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는데 실제 일을 하면서야 영작문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중앙에 있을 때, 미국 출장 한번, 유럽출장 한번, 일본출장 2번을 다녀 온 적이 있었다. 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첫 1998년도 가을 미국출장 때 당시 고객이었던 GE와 머크를 들리고 뉴욕에서 “비즈니스 모델 특허”에 대한 세미나도 많았다. 나중에 우리나라에서 비즈니스 모델 특허에 대한 논란이 많을 때 그에 대한 세미나를 전자신문과 참여하였을 때 미국에서 참여했던 내용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출장 중에 수도 워싱턴 DC에서 미국특허변호사 컨퍼런스를 참석하였다. 거기에서 특허침해소송에 관한 토론회가 있었는데 들어가 보았더니 컨퍼런스 룸 중 가장 큰 곳에서 700여명이 참여를 하였다. 미국에서도 특허침해소송이 회사의 장래를 뒤 흔들 정도의 위력을 가지다가 보니 관심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기 때문이었다.
나도 가서 단순 참여하기는 싫어서 토론회 끝나자 마자 질문을 받는 시간에 가장 먼저 손을 들고 질문을 하였다. 나는 한국에서 특허침해 소송을 실제로 하는 변호사 Thomas Kong(내 한국 이름 석환’을 외국사람 들이 발음하기 어려워 버클리에서부터 영문 이름으로 ''Thomas로 사용함)이다.
당신들이 특허소송에서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용어를 피하고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취지에는 동감하는데 실제에는 힘이 든다. 나도 한국에서 판사들이 기술적인 용어를 잘 이해를 못하여 비슷한 시도는 해 보았지만 전문용어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 쓰는 말(Layman’s language)를 쓰게 되면 의미가 불확실하여져 문제가 있는 적이 있었다. 라고 질문을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나서는 것을 기피하고 좀 얌전을 떨어야 겸손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사람 들하고 비즈니스를 하려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상대방이 자기를 알아 주게 된다. 그래서 질문시간 다 끝나고 토론자에게 나가서 방금 질문 하였던 누구라고 나를 소개하고 명함을 교환해야 나중에 연락해도 답이 오는 법이다. 미국에 오래 살은 경험도 있고 하여 미국출장을 갔을 때 적극적으로 대처를 하였다.
일본에 출장을 갔을 때 당시 소니를 대리한 큰 특허소송이 있어 그러한 소송의 진행과 전략에 대해서 이야기 했고, NEC를 갔을 때는 거기 특허부서에 일하는 사람들 앞에서 한국에서의 특허 실무에 대해 강의를 해 달라고 하여 강의를 영어로 할 것인가를 물었더니 그 쪽 실무진들이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하여 일본어 통역을 대동하고 가서 통역으로 진행을 하였다. 그런데 NEC사내 특허관련자 강의인데 80여명이 나와서 깜작 놀랐다. 그리고 그 질문의 수준도 아주 높았다.
그리고 일본 중소기업의 특허 업무를 대리하여 주는 전문회사에 가서 강의도 하였다. 그리고 저녁을 같이 하여 회를 먹는데 아직 물고기가 살아서 입을 뻥끗 뻥끗하는 가운데 옆의 살을 회로 쳐서 같이 접시로 내 온 것을 처음 보게 되었다. 요새는 한국서도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지만 처음 경험할 때에는 신기하면서도 엽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과 일을 해 보면 정서적으로는 한국사람과 일본사람들이 잘 어울리는데 극우파들이 정치를 하면서 서로 과거의 역사를 결자해지 못하고 계속 독도에 대한 영유권분쟁을 만들어 양쪽 국민을 이간질한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 출범한 일본 민주당 정부가 한일관계를 협력관계로 만들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 우리도 일방적인 반일감정보다는 실익을 위해 협력할 것을 하여야 한다.
1999년도 3월초에 2주간 유럽출장에 다녀 오게 되었다. 만약 1989년에 시카고대학 대신에 독일로 가서 박사후 연구원을 하였으면 유럽생활을 먼저 하게 되었겠지만 그 때가 개인적으로 처음 유럽여행이었다. 당시 화학부에 있던 김모 변리사와 둘이서 다녀 오게 되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내려 밤에 다시 비행기를 갈아 타고 뮌헨으로 가게 되었다. 그 다음날 아침 처음 보는 유럽의 도시 풍경은 눈이 덮인 가운데 고풍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뮌헨은 2차 세계대전에 전장터에서 떨어져 있어서 오래된 건물이 많이 보전되어 있었다. 같이 협력하는 사무실 사람들과 업무 협의를 하고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떠났다.
그런데 원래 당시 특허소송을 진행하던 훽스트와 프랑크푸르트에서 미팅을 가질 계획으로 하루를 비워 놓았는데 담당자가 외국회사와 M&A로 바쁘게 되어 미팅을 취소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루가 비는 바람에 궁리를 하다가 황태자의 첫사랑의 무대가 된 하이델베르크를 다녀 오게 되었다.
하이델베르크는 대학도 유명하지만 부근에 고성이 참 볼만하다. 가서 보면 성의 규모에도 놀라지만 가장 경탄스러운 것은 포도주 통의 크기다 말이 포도주 통이지 거의 5-6인 탈 수 있는 통나무배 두개를 겹쳐서 만들어 놓은 크기였다. 그리고 유럽의 고성을 보니 벽면등에 오래된 역사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은 독일 소시지를 안주삼아 독일 맥주로 한잔 하였다. 우연히 가게 된 것 치고는 너무나 행운이었다.
그리고 다음 기착지로 독일의 유명 화학회사인 바스프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규모가 너무 컸다. 실무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았더니 자기 회사가 미국 듀퐁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화학회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 암모니아를 첫 합성한 철물구조물을 기념으로 보존해 놓은 것을 보게 되었다. “프리츠 하버”교수가 이론을 내고 바스프에 근무하던 “칼 보쉬”가 완성한 암모니아 합성기술은 화학비료 및 화약 제조 등 세계 역사를 바꿀만한 큰 발명이고 그러한 합성기술이 바스프라는 회사를 세계적인 화학회사로 만들게 된 초석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 합성에 사용한 철물 구조물을 회사에 가보처럼 보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음 목적지로 스위스 바젤에 가서 로슈, 노바티스 두군데 제약회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젤에 가보니 우리나라로 치면 도시규모가 춘천정도 되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한 조그마한 도시에 세계 10대안에 들어가는 큰 제약사 2곳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아니하였다.
금요일 로슈하고 미팅을 하는데 외부에서 점심을 하자고 하여 라인강변에 식당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 음식이 고급스럽고 좋았다. 양은 많지 않아도 깔끔한 프랑스 요리를 대접받았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나중에 가족들하고 방문을 다시 할 경우를 대비하여 식당 이름을 알아 두어야 겠다고 이야기 했다. 로슈 부사장말이 여기는 너무 비싼 곳이라서 자기들도 손님 대접하기 위해 회사 비용으로 올 때만 오지 가족들하고는 못 오는 곳이라고 답을 하여 포기했다.
버클리에서 대학원생활을 할 때 들려 보았던 당시 미국 최대의 바이오 회사인 지넨텍을 로슈가 인수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랬더니, 로슈에서 하는 말이 자기들은 멀리 보고 지넨텍을 인수하였지만 연구 계획은 자율에 맡겨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인수 금액이나 인수 후 계속 연구비 지원금액이 만만치 않은 액수인데 스위스의 조그마한 도시에 있는 회사가 그렇게 멀리 보고 투자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당연히 비즈니스 약속이 없어 호텔방에만 있을 수 없어 김변리사와 상의하여 알프스산맥에 가서 구경도 하고 스키도 타고 오기로 했다.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 바젤에서 2시간 정도에 있는 스키장을 토요일 아침 일찍 기차로 가기로 하였다. 스키장에 도착해서 두번의 곤돌라를 타고 올라 가 보았더니 해발 3000m 넘어서 앞프스 전체가 멀리나마 다 보이는 것이었다. 그 곳에서 자연설로 스키를 타는데 사람이 지나가지 않은 채 눈이 다져지지 아니하여 푹푹 빠지는데 오히려 힘이 많이 들었다. 비즈니스 여행을 와서 마침 스위스에서 주말을 맞아 이러한 좋은 경험을 가지게 된 것은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월요일에 노바티스하고 미팅을 가졌다. 당시 노바티스의 중요한 특허소송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전략에 관하여 오전회의를 끝낸 후 회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하는데 포도주를 반주로 하는데 한두잔이 아니라 거의 열잔 가까이 마시게 되었다. 유럽사람들이 점심을 두시간씩 한다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실제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노바티스는 획기적인 항암제인 글리벡을 발매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로슈는 최근 길리아드로부터 권리를 받은 항바이러스제를 발매하여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최근 삼성전자가 바이오사업에 진출한다고 하면서 기대를 가지게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스위스를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자원이 별로 없는 국가가 멀리 보면서 기술개발을 하여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는 분야가 상당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차로 다음 목적지인 이태리 밀라노로 가게 되었다. 알프스를 넘어 옆에서 보이는 이탈리아의 풍경이 낯설어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탈리아가 반도 국가라서 우리나라와 흡사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는데 택시 운전사가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니까 갑자가 유턴을 하여 휙 도는데 깜작 놀랐다. 독일과 스위스에서도 택시를 타 보았지만 얌전하게 운전을 하였는데 이탈리아 택시 운전사들은 다혈질인지 우리나라 택시 운전사들 못지 않게 폭투였다.
오전에는 파마시아라는 제약회사에 가서 실무협의를 하고 점심을 밀라노에서 가장 큰 특허사무소 대표하고 약속이 되어 있었다. 식당에 들어 가는데 건물이 당당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우리나라 회집처럼 식당 입구에 생선이 진열되어 있는데 회로 먹지 아니하니까 활어로 진열된 것은 아니고 얼음에 채여진 채 있었다.
그리고 들어가자 마자 우리를 대접하는 사람들이 식당주인에게 오늘 어떤 생선이 좋냐고 물어서 생선요리를 대접받게 되었다. 이탈리아 정식요리도 생선을 가볍게 대치어 생선의 원래 결이 살도록 하면서 소스를 조금만 치게 되어 있었다. 포도주와 함께 한 이탈리아 생선 요리의 맟도 일품이었다.
다음 목적지인 프랑스 리용은 비행기로 갔다. 유럽 지적재산권에 관한 컨퍼런스가 열리는 장소로 3일간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토론도 하는 자리였다. 나도 상표 및 특허 침해 소송에 관하여 다른 여러 참석한 사람들과 좋은 토론을 나누었다. 리용은 프랑스에서 내륙에 있는 큰 도시로 우리나라로 치면 대구와 비슷한 도시인데 성당, 시청 등의 시내 건축물이 당당하게 멋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파리에서 우리나라로 가기 때문에 프랑스 고속철인 떼제베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기차길 옆에 고속도로가 평행하게 있는 구간이 있었는데 유럽은 차들도 시속 150KM넘는 고속으로 달린다. 그런데 떼제베가 제 속도를 내면 시속 300KM이상을 내기 때문에 옆에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차들이 뒤로 가는 듯이 보였다. 프랑스 기술력을 느끼는 기회였다.
파리에 도착해서 당시 OECD에 근무하던 친구가 마중을 나와 몽마르뜨 언덕과 에펠탑 부근 등을 보게 되었다. 리용의 건물도 멋있었지만 파리의 건축물들은 거의 다 박물관 수준이었다. 그러한 오래된 건물을 보전하고 있는 파리를 보면 오래된 건물을 보전안하고 새로 지으려고 하는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근에 종로구 오래된 한옥들의 보전문제도 이러한 문화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들었다.
다음 날 토요일 비행기 시간이 오후 늦게라서 친구가 오전시간에 프랑스에서 골프를 한번 쳐 보는 것도 어떻겠냐고 하여 그 동네 골프장을 나갔는데 치고 나가다 보니 8명정도가 플레이를 하고 거기에다가 피크닉 가방을 들고 나온 10명정도의 가족들이 따라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를 보고나서 지나치라고 손짓을 하여 지나치면서 자세히 보니 어른들은 골프를 치고 애들은 옆에서 따라 다니며 소풍 나온 것이었다. 골프도 저렇게 가족들이 여유를 가지고 같이 칠 수 있다는 것이 부럽기만 한 풍경이었다.
중앙법무법인에서 있으면서 고객의 90%가 외국회사였다. 그리고 나머지 10% 한국고객은 내 개인 고객이었다. 그리고 외국제약 회사 큰 곳 두 군데를 대리하여 특허권침해금지가처분소송을 받아 내었다. 그리고 외국회사와 한국회사와 합자계약서 건도 다수 처리하여 보았다.
외국제약을 대리한 특허소송은 사전에 자료 검토를 2-3개월 하고 증거 자료도 필요할 경우 추가 수집하면서 소송진행 중에는 그 분야의 전문가인 교수들에게 감정서를 받는 등 복잡한 소송이다. 특허권침해금지가처분은 특허권에 위반한 물품을 제조 중지하고 남아 있는 물건이 있으면 반출 못하도록 보관 표시를 하는 것으로 특허소송에서 가장 상대방 회사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것이다.
보통의 집행의 경우는 집행관에게 위임하나 특허권침해금지가처분은 집행관이 어떤 것을 해야 될지 잘 알기 어렵기 때문에 내가 직접 같이 동행하여 현장을 나갔다. 그런데 한국 제약회사 공장장에게 판결집행문을 집행관이 보여 주면서 그 집행에 거부하면 공무집행방해에 해당된다고 경고하고 나서 내가 직접 공장을 다니면서 해당 재고품을 가압류하고 당해 시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제조를 하지 못한다는 통지문을 붙여 놓고 왔다.
그 과정에서 공장장의 표정은 마음이 안 스러웠다. 외국회사를 법적으로 대리하는 것이 매국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정당한 외국회사의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국내에 투자도 되고 국제적인 통상마찰 문제로 발생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가서 그러한 집행을 하고 나면 기분이 썩 좋지 아니 하였다.
중앙에서 일하는 동안 세계 일류기업들을 자문하면서 오히려 꺼꾸로 그 사람들의 장기 전략이나 비젼 등을 개인적으로 배운 적이 많다. 그런데 1999년부터 한국에 벤처바람이 불다 보니 나에게 벤처 관련하여 자문을 청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같은 이공계 출신으로서 기술분야에 이해가 깊다 보니 자문을 청하면서 변호사 일보다도 벤처업계일을 직접 나서서 할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특히 2000년 초에 전자신문에서 ‘비즈니스 방법 특허’(BM)에 관하여 주제 발표를 한 후 그 인연으로 정보통신업계를 위한 미래모임이라는 것에 참여하여 다른 벤처기업들과 교류가 더 많아 지게 되었다.
벤처업계에 뛰어 들어서 본격적으로 한 활동은 다음 글에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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