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이학박사 출신이 법대에 진학한 후 변호사가 되어 자기 전공을 살려 환경이나 특허 분야에서 전문변호사 활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도 한국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법조인이 되면 언젠가는 미국처럼 전문변호사 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1991년 4월에 한국에 가족과 함께 귀국한 후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에게 한국의 사법고시를 준비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아버님은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도전해 보라고 말씀하시고 뒤에서 지원하여 주시겠다고 그러셨다.
처가에서는 완전히 뒤집혀 졌다. 장모님 말씀이 서울법대를 나오고도 사법고시에 도전하여 10년씩 안 되는 사람을 보았는데, 미국서 과학자 하던 사람이 한국에 와서 사법고시에 도전해서 될 턱이 있냐고 잘 못하면 폐인이 된다고 우려의 말씀을 계속 하시는 것이다. 무모한 도전으로 생각하신 것이다.
그리고 어머님도 그러한 모험을 하는 것에 좋아 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런데 그러한 처가의 걱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아내가 둘째를 임신하고 한국에 귀국하였다. 그런데 몇 년 걸릴지 모르는 사법고시 준비를 한다고 사위가 나서니 말리시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렇다고 내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미국 법대에 진학하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는 의견을 낸 사람도 있었다. 영어 독해에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미국 법대 진학에 필요한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 변호사는 흔하고 한국법조인이 권위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장남으로 부모님 가까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도 하였다. 당시 미국 경제가 어려워서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있는 분위기에서 미국에 체재하고 싶지 아니한 것도 작용하였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대신 미국법대로 진학하기로 결정하였다면 내 인생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특허전문 변호사를 하다가 미국 벤처기업에 관여하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도 든다.
둘째를 출산하고 나서 장모님에게 도움 받아야 하는 일도 있고 하여 당시 처가가 있던 동작구 사당동에 같은 아파트 단지에 좀 작은 평수 아파트를 전세로 얻어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 해 10월에 둘째가 태어났고 둘째는 딸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출산에 참여하였던 것을 생각하고 우리나라 산부인과에서 출산할 때, 출산실에 따라 들어가려 했더니 간호원이 별 이상한 남편 있다는 식으로 기겁하며 밀어 낸 적이 있었다.
둘째가 태어나고 나서 아무래도 사법고시를 혼자서 준비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어 신림9동의 관악산 가까이의 아파트로 이사하여 계속 준비를 하게 되었다.
막상 신림동으로 이사를 가서도 집에 있으면 애들하고 놀고 느슨하게 되어 고시원에 들어 가게 되었다. 주중에는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주말에만 빨래감을 가지고 들어 와서 가족들을 보게 되었다.
같은 고시원에 공부하던 사람 중에 송영길 국회의원도 있었다. 당시에 서로 고시 공부에 긴장하면서 공부하면서도 식사 시간에 세상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도 나누기도 하였다.
생전 법학책은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대학교 때 휴교하면서 사회서적 등을 읽은 경험 등 사회현상에 대한 평소에 가졌던 관심이 사법고시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즉 법이라는 것이 사회 정의 및 균형을 잡는다는 점에서 실제 내용을 읽어 보면 납득되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경제학도 사법고시 일차시험 준비를 위해 처음 공부하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쉬었다. 문과 출신 중에 사법고시 일차시험에서 경제학이 잘 이해 안되어 점수가 안 나온다는 사람이 있지만 현대 경제학의 대가인 사뮤엘슨이 물리의 역학 법칙등을 수리적으로 이용하여 경제현상을 분석한 것이 주류 경제학의 기본이 되기 때문에 물리학을 공부한 것이 경제학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런데 국사 세계사를 사법고시 일차시험을 위해 암기를 하는 것은 좀 고욕이었다. 그냥 상식으로 읽는 것은 재미있지만 시험준비로 부담을 가지고 억지로 암기를 해야 되는 것은 부담이 되었다.
그리고 1992년말에 신림동의 사법고시 일차시험 준비과정에서 학원 모의시험을 본 결과 성적이 좋아 학원에서 이차시험 준비 강의에 대한 수강료 면제를 받는 일종의 장학금도 받았었다.
1993년에 사법고시 일차시험을 합격한 후 그 해 이차시험도 치루어 본 결과 과락이 없이 점수만 좀 모자라서 그 다음해에는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진행하였다.
다만 1993년에 이차시험을 처음 치루고 보니 필기 속도가 느린 것이 부담이 되었다. 오랬동안 외국에 거주하면서 한글을 직접 쓰는 기회가 적었다.
필기 속도가 느리고 억지로 빨리 쓰면 악필이 되어 알아 보기 어렵게 되어 채점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서예학원에 다니면서 한글 필체를 교정받으면서도 빨리 쓰는 연습도 하였다.
다음해인 1994년에 다시 이차시험을 보는데 문제가 생겼다. 행정법을 보고 나서 점심시간에 다른 학생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 보니 문제를 좀 잘 못 이해하여 한 문제를 좀 엉뚱한 답을 쓴 것 같았다.
그리하여 행정법이 과락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게 되었다. 그랬더니 그 이후 5과목을 치루는데 집중이 되지 아니 하였다. 여기까지 와서 실수를 했다는 자책감이 머리 속에 떠나지 않았다. 당시 한과목만 기준점 밑이면 평균점이 높더라도 불합격되는 것이 과락제도이다.
그런데 나중에 불합격이 된 후 성적을 알아 보고 더 큰 놀라움이 있었다. 그 당시 행정법의 같은 문제에 실수한 사람들이 많아 좀 후하게 채점이 되어 행정법이 과락은 아니었던 것이다. 더 놀란 것은 내가 수석으로 불합격했다는 사실이다.
즉 그 당시 사시전형에는 300명을 뽑는다고 하였는데 그 당시 법조계에서 연 300명도 많다는 의견이 많았다. 지금은 1000명을 넘게 뽑고 이제 로스쿨시대가 되면 연 1500명 이상이 합격할 시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해 300명이 아니라 290명을 뽑았는데 내가 291등으로 떨어진 것이다.
성적은 전화 ARS서비스로 확인하였는데 발표된 합격선과 고시잡지에서 나온 수험생 성적분포를 보았더니, 내 점수가 바로 합격선과 평균 0.15점 차이로 수석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 때 심정은 참담했다. 행정법시험을 보고 나서 그냥 잊고 다음 시험들을 그냥 집중하였으면 이러한 일이 안 나왔을 텐데 하고 자책도 하고 한편으로는 원래 300명 정원인데 그 정원을 290명으로 줄인 그 해 사법고시 관리위원들에 대한 원망도 생겼다.
사실 사법고시 2차시험 준비를 위하여 신림동에서 학원을 다닐 때 학원에서 나이도 많은 편이고 성적도 좋은 편이라 모든 사람들이 내가 합격하는 것을 의심치 아니하였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당분간 남들을 만나기가 싫었다.
그래서 고시원에서 철수하여 당시 가족이 있던 신림동 관악산 바로 밑에 있는 아파트에 들어 가서 공부하기로 하였다. 당시 아들이 한국 나이로 5살, 둘째인 딸이 4살로 아직 장난치고 시끄러울 나이이지만 조용히 하게 하면서 친구들 출입도 막았다. 안방에서 박혀서 그 다음해에 사법고시 일,이차 시험 동시합격을 목표로 하고 공부를 시작하였다.
더구나 아내가 셋째를 임신한 상황인데 나에게 더 이상의 시간은 없었다. 이번이 아니면 다시 더 기회는 없다고 생각하고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1995년에 일차시험을 보고 나니 합격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이차시험준비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일차시험 끝나고 얼마 안된 그 해 4월에 자다가 밤 12시 넘어 아내가 갑자기 진통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가서 막내딸을 낳게 되었다.
그 전에는 애를 나을 때 몇시간을 고생해서 낳았는데 이번에는 세째라서 그런지 쉽게 애를 낳았다. 의사가 연락을 받고 왔을 때 아내가 이미 간호원의 도움을 받아 애를 낳는 해프닝이 있었다.
막내딸이 이쁘게 태어 났어도 좋아 할 분위기도 아니고 다시 두 달 남은 사법고시 2차 준비에 몰두하였어야 했다. 시험장소가 성균관 대였는데 집에서 오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부근 호텔에 투숙하여 마지막 도전을 하였다.
이 번에는 큰 실수를 하지 않아야 되겠다는 생각에 점수를 잘 받기 위해 많은 내용을 쓰기 보다는 출제자가 중요시하는 핵심 내용을 빠뜨리지 않고 쓰는 데에 신경을 썼다.
마지막 과목의 답안을 제출하고 나서 큰 실수는 없었으니 우수한 성적은 아니더라도 합격은 가능하지 않을 가 하는 안도의 감을 가지고 시험장을 나왔다.
시험 끝나고 나서 전에 다니던 학원에 들렸더니 학원장 님이 내 실력을 인정하시고 사법고시 2차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해 강의를 하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 주셨다.
아직 합격 발표 나오기 전에 강의를 하는 것이 좀 어색하기는 하였어도 가장으로서 애들한테 사주고 싶은 것도 있고 하여 가장 자신있는 과목인 상법을 16일간 강의를 하였다. 아직 합격발표 전이지만 남을 강의하고 채점한다는 것이 재미는 있었다.
학원 강의를 끝내고 막상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오자 신경이 예민하여 지기 시작하였다. 이번에 안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들기 시작하였다. 세 자녀의 가장으로 부담감이 작용한 것이다.
합격발표 후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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