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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30년이 지났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그의 후임자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박정희를 달리 평가하고 있는 듯하다. 후임 대통령들의 경우 한결같이 각종 비리에 연루됐다. 반면 박 전 대통령의 경우 30년이 지났지만 감춰진 재산은 발견되지 않았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자란 그는 그처럼 방대한 자금을 관리하면서도 왜 치부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는 어디서 조국근대화의 영감을 얻었을까. 필자는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그의 청소년 시절과 교육에서 찾아본다.
박정희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그의 역사관이다. 그것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부친의 생애에서 시작된다. 그의 모친은 어린 박정희에게 “아버지가 그 때 처형당했더라면 너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부친 박성빈은 부패하고 무능했던 조선왕조를 뒤엎으려 했던 혁명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어린 박정희는 동학의 의미를 몰랐지만 이광수의 역사소설 ‘이순신’과 유성룡의 ‘징비록’을 읽으면서 봉건 조선왕조의 타락상과 후진성을 알게 된다.
역사는 그에게 두 가지 측면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첫째는 조선 왕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다. 부친의 행적에 대해 듣고 이순신 장군을 음해하는 원균의 얘기를 읽은 박정희는 구시대의 질서와 행태를 배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역사는 그가 태어난 당시의 새로운 정치체제, 즉 일본 식민체제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했다. 구체제 하에서 받을 수 없었던 교육과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정희는 시련을 이겨내는 강한 의지를 타고 났다. 20리 산골 길을 혼자 걸어서 등교해야 했던 어린 박정희가 우등생이 되었고 줄곧 급장이 되었다는 데에서 그의 성격을 알게 된다. 가난은 오히려 그의 인내력을 길러주었다.
초등학교에서 사범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까지 그가 받은 모든 교육은 일제 치하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특히 식민 말기엔 일본 군국주의가 강했다. 박정희는 어려서부터 구미 산골에서 전투 훈련을 하던 군인들을 보면서 군대에 매혹됐다. 더욱이 그가 읽은 역사책의 주인공, 마음속의 영웅은 이순신 장군과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의 아버지와 박정희의 아버지가 지닌 공통점도 흥미롭다. 나폴레옹의 아버지는 프랑스에 대항해서 싸왔던 코르시카 반군에 참여했던 인물이지만 나중에 아들을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로 보내 프랑스의 황제가 되게 했다. 박정희의 이순신 흠모는 아산 현충사에서 볼 수 있다. 박정희는 학비를 내지 않고 다닐 수 있었던 사범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나 기숙사의 식대를 내지 못해 결석을 반복해야 했고 사범학교를 꼴찌로 졸업했다. 가난은 그를 놓아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 후의 교사 수업과 경험은 그의 학식을 늘려주었을 뿐 아니라 일을 치밀하게 기획하고 꼼꼼히 따져보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박정희는 군인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서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박정희는 왜 일본 제국주의 군인이 되려고 했던가’라는 비난을 받았다. 박정희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질문은 생뚱맞다. 그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기에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갔을 뿐이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던 코스다. 물론 일본 제국주의 교육은 일본에 대한 ‘충성’을 가르쳤다.
21세기 한국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에겐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요즘 한국 학생들은 일제가 한국인을 억압하고 착취한 적(敵)이었다고만 알고 있다. 그러나 100년 전 한국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일본에 대한 반감이 크지 않았다. 반일감정이 강해진 것은 러일전쟁 후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되면서부터다. 1917년생인 박정희 역시 민족의 비애를 느낄 수밖에 없었지만 일본을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본이 후진 한국에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했다. 식민화에 대한 책임이 무능한 조선의 지배계층에 있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들의 잘못 때문에 후세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박정희는 일본 역사, 그중에서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란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근대화를 가능케 한 역사적 동력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만주에서 박정희가 경험한 관동군의 만주개발도 그의 근대화 모델이 됐다. 만주국을 세운 일본 제국주의는 관동군 주도로 대규모 개발사업을 펼쳤다.
박정희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또 하나는 사생관이다. 자신을 희생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다. 일본육사는 교육지침으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가르친다고 천명했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1977년 대구사범 시절의 일본인 은사 기시 요네사쿠를 만났을 때 “언제나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총을 들고 청와대에 뛰어들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이젠 거꾸로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 수 있으며, 이런 사태에 대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로부터 2년 뒤 실제로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탄에 숨졌다. 박정희의 이런 초연한 사생관은 그의 검소한 삶을 설명해준다. 청와대 식단은 어느 농부의 식단과 다르지 않았다. 청와대에서 처음 숙직을 하게 된 비서 모씨가 빈약한 식단에 푸념을 했을 때 주방장은 대통령 가족이 물린 식탁을 보여주었다. 이에 놀란 비서는 말이 없었다.
과연 박정희는 조국을 배신한 친일파였던가. 21세기를 사는 사람이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규탄하기는 쉽다. 그러나 박정희가 살아 있다면 그는 조국을 배신한 적이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박정희가 교육받던 당시엔 배신해야 할 조국이 없었다. 조선의 봉건 유산은 그에게 고통만 남겨주었다. 박정희는 봉건왕조의 부패와 무능을 혐오했다. 그의 부친은 봉건질서를 전복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인물이다. 박정희 입장에서 볼 때 학업과 출세의 기회를 준 일본에 반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출세해 힘을 키우려 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나의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명예교수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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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객관적인 조사를 통한 글을 이 블로그에 올린 바 있다. http://blog.daum.net/shkong78/320
개인적인 조사결과로 중앙일보에 실린 위 의견에 거의 동의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민족의 역사나 발전과정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진 것이다. 부친이 동학운동을 하신 것은 사회개조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만주육사에 진학한 것도 당시 우리가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선 배워야 한다는 깊은 뜻이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 30년이 되는 이 시점에 박정희 대통령이 완벽한 민주주의 지도자는 아닐지더라도 우리 민족이 부흥하여 세계 유수국가들과 경쟁할 수 있는 초석을 놓으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시점이 우리나라가 다시 세계강국의 하나로 재도약할 수 있는 가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비젼을 다시 새겨 보았으면 한다.
지금 국민을 분열시키고 있는 세종시, 사대강사업도 만약 박정희 대통령이 아직 살아 계셨다면 어떤 의견을 주실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블로그의 테마로 '4대강사업 및 세종시사업 원점에서 재 검토하여야 한다 '는 글을 올린 바 있다.
국민들이 화합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깊은 뜻을 헤아려 우리나라가 국제적인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의회민주주의 절차를 거쳐 의견을 수렴하여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