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Indiana_Jones_in_Raiders_of_the_Lost_Ark.jpg
Yale Peabody Museum file
인디애나 죤스 박사가 등장하는 시리즈는 루카스가 감독하고 해리슨 포드가 주연으로 나오는 "Raiders of the lost Arc(잃어버린 방주의 탈취자)"로 1981년에 처음 시작하여 그 이후 4편의 영화가 후속편으로 제작되었다. 인디애나 죤스는 1930년 대에 활약한 고고학자로서 정보기관인 OSS의 스파이를 하면서 숨겨진 과거의 유적을 찾는 역할을 한다. 이 영화시리즈의 성공으로 인디애나 죤스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상설 전시되고 미국국민들에 대한 여론 조사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영화 캐릭터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인디애나 죤스 박사 시리즈를 만들 때 그 실제 모델이 된 인물이 있는 가에 대해 루카스 감독은 명확히 밝히지 아니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델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히람 빙햄 3세이다. 위의 사진들중 앞의 것이 인디애나 죤스로 나온 해리슨 포드의 모습이고 뒤가 1910년대 페루의 유적인 마추피추를 탐험한 히람 빙햄 3세이다. 많이 유사한 것을 느낄 수 있다.
히람 빙햄3세는 187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태어났다.그의 할아버지 히람 빙햄 1세와 그의 아버지 히람 빙햄 2세는 둘다 기독교 전도사였다.. 그런데 왕가도 아니고 왜 이름을 같이 쓰면서 1, 2, 3세로 간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는 예일대학에서 학사를 받고 버클리에서도 2년 공부를 하고나서 1905년 하바드 대학에서 박사를 받는다. 동서부의 명문대를 두루 걸친 것이다. 하바드, 프린스턴에도 강의를 조금 하다가 예일대학에 남아메리카 역사를 가르치는 역할로 강사 자리를 얻는다.
출처 위키 미디아 공용 http://en.wikipedia.org/wiki/File:Hiram_Bingham_at_Machu_Picchu_ruins_1911.jpg
그는 1908년 칠레 산티에고에서 열린 전미과학자회의에 참석한 후 미국에 돌아 오다가 페루에 들려 마추피추 유적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그가 마추피추를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은 아니다. 그가 유명하여진 것은 예일대학과 미국지리학회의 도움을 받아. 1911, 1912, 1915년 조직적인 탐사를 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위 칼라 사진은 1911년 그가 마추피추에서 탐사하던 당시 찍은 흑백사진을 유리에 복사한후 채색을 한 것이다(사진의 위 사람이 히람 빙햄).
위키미디아 공용 http://en.wikipedia.org/wiki/File:80_-_Machu_Picchu_-_Juin_2009_-_edit.2.jpg
페루의 마추피추는 해발 2430m에 위치한 15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잉카 유적지이다. 나는 그곳을 아직 가 보지 못하였으나 죽기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최근 여러 블로그에 마추피추를 방문하고 찍은 좋은 사진들이 많이 올라온다. 위 사진은 위키미디아 공용으로 일반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진으로 2009년 6월에 촬영된 사진이다.
탐사후 그는 4000여점이 넘는 토기, 직물, 인간의 뼈 등을 예일대학에 가지고 왔다. 그 덕인지 그는 예일대학의 정교수가 된다. 그러한 유물이 불법 반출되었다고 페루에서 반환을 요구하다가 2010년 11월 19일 예일대학은 그 유물을 전부 페루에 돌려 주기로 발표하였다.
자세한 것은 이 블로그의 글 "예일대학 페루 마추피추 유물 반환" 참조 http://blog.daum.net/shkong78/855
출처 위키 미디아 공용 http://en.wikipedia.org/wiki/File:HirambinghamIII.jpg
그런데 빙햄은 예일대학교수를 하다가 1922년 예일 대학이 소재한 코네티컷 주의 부주지사로 당선된다. 1924년에는 공화당 후보로 나와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연임을 한다. 위 사진은 상원의원을 할 때 찍은 사진으로서 밀림을 누비던 인디애나 죤스의 분위기하고는 차이가 난다. 상원의원 시절 그는 캘빈 쿨리지 대통령에 의해 항공 위원회의 멤버로 위촉된다. 그러자 언론에서는 탐험가의 경력이 있는 그에게 "날라다니는 상원의원(The Flying Senator)"이라는 별명을 붙여준다.그러나 대공황 이후 민주당이 득세하여 1932년 상원선거에서는 실패를 하여 정계를 떠나게 된다.
그는 1899년 유명한 보석상 티파니를 창시한 챨스 티파니의 외손녀인 알프레다 미첼과 결혼하여 7명의 아들을 낳는다. 7명의 아들들이 교수, 예술가, 하원의원, 외교관, 의사, 변호사, 목사 등 소위 사회에서 존경받는 직업을 다 한다. 1982년에 템플 대학에서 샤르 밀러가 "아버지와 아들 (Fathers and sons)"이라는 제목으로 빙햄과 그 아들들의 활약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출간한다.
그는 노년에 바람이 나서 1937년(만62세)에 재혼을 한다. 재혼으로부터 자식은 없으나 늙어서까지 낭만을 한번 더 찾아 보았다고 이야기 하면 너무 긍정적인 표현일가?
학교 강사를 하다가 남미 밀림에서 유적 발굴을 하고 정치가 역할도 하면서 아들 7명 키우고 말년에 다시 로맨스를 가진 히람 빙햄 3세가 인디애나 죤스 박사의 실제 모델에 제일 가깝다는 것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거의 다 동의할 것으로 생각하며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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