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

전설의 여자비행사 아멜리아 에어하르트

공석환 2010. 12. 19. 06:36

 

 

  최초로 대서양을 단독 비행한 것은 1927년  찰스 린드버그이다. 챨스 린드버그는 파리에 무사히 착륙한 당시에 시대를 앞서간 영웅이 되었다. 아멜리아 에어하르트는 미국의 여자비행사로 1932년 여성으로서 최초로 대서양을 단독 비행한 후 여자 린드버그라고 불리우면서 사회적 명사가 되었다.  여성비행사로 여러 기록을 남기다가 1937년 항법사인 프레드 누난과 함께 세계일주를 하는 도중에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실종된다.  실종후 대대적인 수색이 이루어졌으나 그녀의 시신이나 비행기를 찾지 못하였다.

 

 

아멜리아 에어하르트의 이야기는 여러번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여다. 2009년에 오스카상을 두번이나 수상한 힐러리 스왕크가 주연한 "아멜리아"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위에 올린 것이 그 예고편의 영상이다.

 

 

File:Amelia earhart.jpeg

위키미디아 공용 http://en.wikipedia.org/wiki/File:Amelia_earhart.jpeg

 

 

아멜리아 에어하르트의 위 실제 사진과 힐러리 스왕크의 도전적인 이미지는 매우 비슷하다. 그런데 영화에 대한 평은 그리 높지 아니하였다, 개인적인 사랑 등 사생활의 부분이  불명확하게 처리되어 주제가 흐릿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남편인 죠지 푸트남역에 리차드 기어, 그녀의 연인 역으로 이완 맥그리거라는 호화배역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하였다. 

 

 2010년 3월 나는 비행기내의 기내방송에서 우연히 위 영화를 흥미있게 보았다. 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세계일주이다. 자유여행으로 다니는 방법, 세계일주 크루즈를 타는 방법도 있지만 가장 화려한 방법이 비행기를 직접 몰고 세계를 한바뀌 도는 것이다.   비록 아멜리아가 태평양 한가운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그 전에 아프리카 남아시아를 비행기로 돌면서 하늘 위에서 보여주는 경치는 매혹적이었다.

 

 

아멜리아 에어하르트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더 알아 본다. 그녀는 1897년 7월 27일 미국 캔사스주의 애치슨에서 태어났다. . 그녀의  외할아버지 알프레드 기디언 오티스는 연방법원판사와 애치슨 저축은행장도 지낸 그 동네의 유지였다.  그의 아버지 에드윈 에어하르트는 변호사자격을 따고 철도회사에서 소송관련 업무를 하였다. 아멜리아는 아버지의 일 관계로 10세에 아이오와주 이사를 가서 주에서 하는 축제에서 처음 비행기 쇼를 보고 강한 자극을 받는다.

 

1921년 1월에 캘리포니아에서 아멜리아가 처음 비행기 조종을 배우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전에 컬럼비아 대학을 1년 다니다가 중퇴하는 등 방황이 많았다. 특히 아버지가  알콜 중독으로 직장을 중간에 그만두고 재활치료를 받는 등 가정사가 복잡하여진 관계로 개인적인 고민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비행기 조종을 배우기 시작한 후 지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가진 아멜리아는 그 것에만 몰두하였다. 1922년 10월 22일 그녀는 고도 4,300m까지 올라 당시 여자조종사로서는 가장 높이 비행을 한 기록을 세웠다.

 

 

챨스 린드버그가 1927년 대서양을 단독으로 비행한 후 애미 필립 게스트 라는 여자 부호가 여자 조종사로서 대서양을 단독 비행할 후보를 찾아 지원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한 여자 조종사 후보를 찾기 위한 위원회에 출판업자인 죠지 푸트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아멜리아 에어하르트를 인터뷰한 후 1928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대서양을 횡단하는 팀에 그녀를 포함시켰다. 

 

그후 아멜리아는 1931년 2월 7일 죠지 푸트남과 결혼을 한다.  죠지 푸트남은 그녀보다 10년 연상으로 이전 결혼에서 자식도 둘이 있었다.  새로운 결혼에서 둘은 아이를 가지지 아니한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르는 서양의 풍습을 배격하고 자신의 처녀때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다. 아멜리아의 독립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File:Lockheed Vega 5b Smithsonian.jpg

출처 위키미디아 공용 http://en.wikipedia.org/wiki/File:Lockheed_Vega_5b_Smithsonian.jpg

 

 죠지 푸트남은 아멜리아의 비행을 뒤에서 많은 지원을 한다.  그리하여 아멜리아는 1932년 5월 20일 캐나다 뉴펀들랜드에서 출발하여 챨스 린드버그와 같이 파리를 최종 목표지로 하여 단독비행을 시도한다. 그녀는 강한 바람속에 14시간 56분을 비행한 후 북아일랜드의 데리에 착륙한다. 그러나 여자로서 최초로 대서양 단독비행을 인정받게 되어 유명인사가 된다.   그녀가 비행한 단발기 록히드 베가 5b는 위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현재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스미소니안의 국립 항공우주 박물관에 역사적 기념물로서 보관되어 있다.

 

 

File:Earhart-electra 10.jpg

출처 위키미디아 공용 http://en.wikipedia.org/wiki/File:Earhart-electra_10.jpg

 

그녀는 이후 퍼듀대학에서 여성진로를 지도하는 분야의 교환교수와 항공학과 자문을 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한다. 그녀는 프랭크 누난을 항법사로 하여 위 사진에 보이는 엔진이 2개인 쌍발기인 록키드 Model 10 엘렉트라라는 비행기를 이용하여  세계일주를 하는 계획을 발표하여 1937년 6월 1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를 출발하였다.  남미, 아프리카, 인디아, 남아시아를 거쳐 6월 29일 뉴기니아를 도착한다. 그 시점에 이미 35,000km를 뛰었고 태평양을 넘어 11,000km을 가면 계획한 세계일주를 마칠 수 있게 된 것이다.

 

7월 2일 뉴기니아를 출발하여 다음 기착지인 하울랜드 섬( Howland Island )에 향하는 도중에 수차례 교신을 한 후 실종된다. 다음 목적지인 하울랜드를 찾지 못하고 연료가 떨어진 것이다. 실종후 대대적인 수색이 있었으나 실종자 및 기체를 찾지 못하였다.

 

 

File:Nikumaroro drawing.jpg

출처 위키미디아 공용 http://en.wikipedia.org/wiki/File:Nikumaroro_drawing.jpg

 

 지금까지 위 비행기가 바다 중간에 떨어져서 가라 앉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대세였다. 그러나 최근 그녀가 탄 비행기가 위 사진에 보이는 산호초로 이루어진 무인도였던 가드너섬(Gardener Island, 현재는 Nikumororo로 불리움)의 암초에 비상착륙한 후 두 사람이 몇 개월을 생존하였다가 굶주림과 부상의 여파로 사망하였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링크 참조

 http://www.usatoday.com/tech/science/discoveries/2010-12-17-search-for-amelia-earhart_N.htm?csp=hf

 

1940년 영국인이 위 섬에서 여자의 유골로 보이는 뼈와  육각의 그리고 비행기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이는 알루미늄판을 발견하였다. 유골이 피지로 보내진 후 그 유골을 검사한 의사는 167cm의 남자의 유골이라고 판정하였고 그 후 유골은 멸실되었다. 그러나 그때 의사가 측정한 유골의 크기를 지금 다른 의사들이 판정한 결과 서양여성의 유골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최근 그 섬에서 발견된 유물 중 물을 끓이다가 밑에 그을은 자국이 있는 병과 여자의 화장품으로 추측되는 물건을 발견하였다.  일부 남아 있는 유골을 다시 수거하여 아멜리아 에어하르트의 친척의 DNA와 비교하는 작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만약 그 유골이 아멜리아의 것으로 판정되면 가드너섬에 착륙하였다는 설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녀가 실종된 후 이미 70년이 넘었다. 사실 바다에 그대로 침몰한 것과 산호초에 착륙한 후 나중에 사망한 것이 현 시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지막 족적을 확실히 하겠다고 이러한 검증을 들어가는 이유를 생각하여 보자.

 

우리는 흔히 미국에서는 남녀가 평등한 대접을 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1920년에야 미국 여성이 처음 선거권을 얻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28세이상의 여성에게만 선거권을 인정하다가 1928년에야 남녀 같이 21세에 선거권을 인정하였다.

 

아멜리아 에어하르트가 여자 조종사로서 활동을 활발히 한 시점이 미국에서 여성의 권익을 찾기 위하여 노력한 시점과 겹친다.  여자도 남자와 같이 비행기를 단독으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오랜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녀에 대한 존경심에서 마지막 실종과 사망의 족적을 확실히 하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도 남녀가 사회취업이나 활동에서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지금 큰 사회 이슈가 되고 있다. 군가산점 관련하여서는 역차별 논의까지 발생하여 여자도 군을 대체한 의무복무를 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사회활동을 하는데 육아, 성희롱 등 많은 장애가 있는 점을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그래서 여쟈들은 비교적 차별이 적은 교사, 공무원 쪽으로만  몰리고 있다. 더구나 최근 젊은 여교사들에 대한 학생들에 의한 성희롱에 의한 교권침해가 나오면서 여자의 사회활동에 대한 차별의 문제가 더 혼란스러워 진다.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낮아져서  향후 노동력이 모자라는 것이 예측되는 상황에서 여자들의 사회활동 보장은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여자들이 선호하는  교직, 공무원이 아닌 사기업에서도 동등한 대접을 받고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여자들 자신도 시집을 잘 가기 위하여 대학을 간다는 소극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사회에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하여야 한다.   미국의  여자 조종사 아멜리에 에어하르트가 사후에도  존경심을 받는 이유는 남자들이 우위였던 비행 조종사 분야에서 여자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태도와 능력을 보여 준 것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